산이 나를 부른다
누군가가 나에게 산에 왜 오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릅니다. 하지만 거짓말 탐지기에 손을 얹어 놓고 이렇게 대답했다면 나는 아악하고 까무러쳤을 것이다. 산에 왜 오르는가. 이건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이것은 나를 학대하는 짓이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건 자해다. 자해를 왜 하는가. 그것도 왜 다 같이 모여서 이러는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착각의 동물이다. 다신 올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건강해진다는 착각으로 산에 기어 올라간다. 등산 한 번으로 건강해진다면 산은 인간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명동 거리처럼 빽빽하게 끼어 등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2월의 시작을 등산으로 결정한 건 내 생각이 아니었다. 나와 친구 T는 전날 함께 배구 경기를 봤고 배구 경기를 보고 T의 집에서 자기로 했고 H가 합류해서 놀다가 다음날 등산을 가기로 한 것이다. 제안은 T가 했으나 나와 H는 군말 없이 동의했다. 왜냐면 나는 한라산을 등반한 산악인이니까. 모악산은 껌이지. 거기 동네 뒷동산 아니냐? 퐈하.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나는 등산화도, 등산복도, 스틱도 아무것도 없었다. 등산화는 H가 빌려주기로 했지만, 막상 신어 보니 발가락이 당겨서 신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신고 온 반스를 신고 산을 오르기로 했다. 친구들은 걱정했지만,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휴, 모악산 그까짓 거, 괜찮아, 괜찮아.
전날 맥주와 팝콘을 잔뜩 먹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잤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이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등산은 무슨, 푹 자자. 느지막이 일어나서 콩나물국밥이나 한 그릇 때리고 헤어지면 되겠지. 하지만 그들은 만만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문밖에서 돌아가면서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일어나아.. 일어났니.. 마치 화장실 귀신같은 목소리였다. 일어나지 않으면 빨간 휴지도 파란 휴지도 주지 않을 거야..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친구들은 상쾌한 얼굴이었다. 나만 죽상을 하고 앉아있었다. 너희 정말 갈 거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들은 벌써 준비를 마친 뒤였다. 나는 애써 밝은 모습으로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모악산의 아침은 정말 상쾌하구나! 이렇게 상쾌한 건 주차장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일까! 아무도 없네! 1월 1일도 아니고, 2월의 시작이라고 해도 평일에 모악산을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친구 T가 편의점에서 단백질 바를 사는 동안 나와 H는 화장실에 가서 몸도 비우고 마음도 비우며 산에 오를 준비를 끝냈다. 우리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가벼워 보이는 사람은 나였다. 뒷동산 아니냐, 뒷동산!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뒤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나 너무 힘들어.. 힘들어.. 대체 너는 여기에 왜 오자고 한 거니. T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거의 90도로 몸을 굽히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와 H는 이만큼 오르다 T의 생사를 확인하고 또 저만큼 오르다 T의 생사를 확인하는 식으로 산을 올랐다. 우리가 다시 T의 생사를 위해 걸음을 멈췄을 땐 99세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스틱을 짚고 천천히 T를 앞지르고 있었다.
모악산엔 대피소가 없다. 대신 절이 있다. 그리고 그 절에는 엄청난 것이 있다. 바로 동물들이다. 그 절엔 토끼가 있고 고양이가 있다. 개짖는 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어딘가엔 개도 있을 것이다. 토끼를 보자 할머니가 키우던 토끼를 잡아먹은 일이 생각났다. 토끼탕을 끓여 먹었지. 할머니가 나를 불러 먹어보라며 국물을 한 숟갈 떠 먹여줬는데, 그게 내 토끼를 끓인 물일 줄이야. 할머니는 나를 공범으로 만들 셈이었던 거다. 동생에겐 엄청나게 트라우마가 된 그 사건이 나한테는 이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내가 정말 공범이라서 그런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천국 같은 그곳에서 찰나의 휴식을 즐겼다. 하지만 여긴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저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토끼탕 생각할 때가 아니야, 그래, 가자!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다. 한라산처럼 몇 시에 대피소를 지나고, 몇 시까지 정상에 도착해야 된다는 건 없었지만 H가 제시간에 가게 문을 열려면 적어도 10시 반에는 등반을 마쳐야 했다. 늘 그렇듯 등산을 하면 말이 없어진다. 아무리 말 많은 사람도 산에 오르면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산을 타면서 말을 하면 말을 하다가 기절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한라산보다 모악산이 더 힘들 수 있지. 스틱이 없어서인가, 등산화를 안 신어서인가. 그때 불현듯 한라산 등반을 함께 한 M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한라산의 미친 계단 앞에서였다. 모악산에도 이런 계단 있는데. 천국의 계단..
나는 더 오를 힘이 없었다. 천국의 계단을 타고 가다가 정말 천국으로 가게 될 것 같아서였다. 나와 H는 T를 기다린다는 이유로 중간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얼마 뒤 영혼이 빠진 얼굴로 T가 합류했다. 침묵만이 감돌던 순간,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곧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이 우리 옆을 지나쳤다. 나는 그들을 붙잡았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나요? 20분만 가면 돼요! 그들의 목소리는 발랄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20분이라고 했으니까 40분은 걸릴 거야. 정상을 찍은 사람들은 다 뻥쟁이가 돼서 내려오거든. 한라산에서 수많은 뻥쟁이들을 만났기 때문에 난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T가 말했다. 쟤들 자기들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운동 안 하면 우리 늙어서 저렇게 된다.
한라산에서 M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T도 우리에게 손짓했다. 먼저가.. 먼저가.. 나와 H는 T를 버리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여긴 표지판도 없냐.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줘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 나는 끊임없이 구시렁댔다. H의 뒷모습은 씩씩했다. 다부져 보였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대신해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H를 사랑한다. 사랑하면 한 몸 아닌가.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 그러니 H가 정상에 오르면 내가 올랐다고 할 수 있는 거다. H의 궁둥이를 보며 오르던 중 우리는 두 번째 대피소를 만났다. 대피소라고 하기에는 조금 허접한, 벤치 몇 개가 놓여있는 곳. 나와 H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벤치에 드러누웠다. 한참 뒤 뒤따라온 T도 벤치를 보곤 얼른 드러누웠다. 우리 이제 내려갈까? 누가 먼저 그 말을 꺼냈던가. 누가 꺼냈든 나머지 둘이 반색했다. 셋 중 누구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정상엔 올라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어도 나머지 둘의 설득으로 하산을 결정했을 것이다.
한라산 하산길은 정말이지 이러다 죽겠다 싶었는데 모악산 하산길은 너무나 산뜻했다. 우리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까르르거리기도 했다. 뭐, 다음에 오면 되니까! 오늘은 시간이 없잖아! 마치 시간만 있었다면 정상에 갈 수 있었던 것처럼 가식적인 대화가 오갔다. 사람들에게 화이팅! 안녕하세요오! 인사도 건네는 여유까지 생겼다. 나는 정상을 찍고 내려온 사람처럼 자, 얼마 안 남았습니다! 금방입니다! 이딴 말도 했다. 친구들이 킥킥댔다. 다리 한쪽 걷고 등산하면 애인을 찾는다는 거래. 진짜? 응 진짜. 이런 이상한 농담도 하며, 정신이 든 T가 젊은 남자들을 보고 매일 등산을 하면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으며 우리는 가뿐하게 하산했다. 그리고 H가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등산하는 거 어떠냐고 제안했을 때, T와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좋아! 하고 대답했다. 인간은 정말이지.. 망각의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