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를 깨다
“이 궁전의 주인은 당신이오, 프시케.”
프시케는 놀랐습니다. 그 말의 뜻보다, 낮고도 부드러운 남자의 음성에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였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사내가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프시케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천천히 일어나 앉았습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당신은 나의 운명이오, 프시케. 나는…… 당신을 신부로 삼기 위해 여기로 데려왔소.”
프시케는 그가 신탁이 말한 자신의 신랑이 될 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제피로스의 바람을 타고 날아온 만큼, 신랑의 정체가 범상한 인물은 아닐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고, 그녀의 운명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프시케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신의 뜻인가요?”
프시케는 믿음이 깊은 신실한 왕족 처녀였고, 신의 뜻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형벌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로 저주일까요? 저주라고 하기에 이곳은 너무나 안락하고,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했습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프시케는 가까워 오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천상에서 피어나는 꽃에서 날 법한, 진한 향내였습니다. 그리고 단단하고 따뜻한 피부와 맞닿았습니다. 사내는 그녀의 팔을 잡고 그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그렇소, 프시케. 이것이 신의 뜻이오.”
프시케의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습니다. 두려움에만 휩싸여 있었지 정말로 근사한 신랑과 함께 첫날밤을 보낼 준비는 안 되어 있었습니다. 침대로 올라온 사내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고 누웠습니다. 그의 품에 안긴 프시케는 가슴이 뛰었지만 마음은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랑’은 낯선 곳에서의 밤 내내, 그녀를 따뜻하고 힘 있게 안아 주었습니다.
그날부터 프시케는 궁전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을 올린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이 바라는 대로, 신부가 된 것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녀를 끔찍이도 위해 주는 한없이 다정하고 자상한 남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시케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낮에는 그녀의 곁에 없었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할 일이 있다는 말만 해주고는 아침이 되면 떠났습니다. 그리고 밤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밝은 대낮에 프시케는 남편과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프시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때로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궁전이 아무리 그녀를 위해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해 주고, 때가 되면 맛있는 음식들과 향료를 푼 목욕물을 내어 주어도 마음 속의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랬습니다.
밤에는 사랑을 속삭이다가 낮에는 그것이 거짓인 것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져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가 마치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언젠가는 이 꿈에서 깨어나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아침이 되어도 저와 함께 있어주면 안 되나요?”
프시케가 잠자리에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프시케는 재차 말했습니다.
“하루종일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로워요. 여긴 아무도 없잖아요. 당신이 없으면 여긴 꿈 같아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저는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그 시간이 너무 길어요. 갈수록 길어져요.”
남편은 그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습니다. 낮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것 때문일 것입니다. 프시케는 답답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큰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믿을 수 있을까요? 불안한 마음은 의심을 만들어 냈습니다. 프시케는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가족들이 그리워요. 제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마 저를 몹시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남편은 침묵 끝에 돌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반응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나의 아내가 되었소. 나로는 충분하지 않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직이 말했지만 프시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더 마음을 주게 되었는데, 그는 그녀에게 충분한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남편은 프시케의 가족을 궁전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프시케가 고향으로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지, 그녀가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은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내내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가 부드럽게 물어 왔습니다.
“무언가 다른 건 원하는 건 없소?”
남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줄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프시케는 고개를 저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믿음을 원해요.
다음 날, 프시케의 언니인 두 공주가 궁전에 도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피로스의 바람을 타고 온 것이었습니다. 공주들은 처음 궁전에 왔던 프시케와 마찬가지로 놀라 이곳저곳을 돌아보다가, 반가움에 달려오는 프시케를 보고 서로 껴안고 기뻐했습니다.
“살아 있었구나, 프시케!”
얼마간 진정이 된 후에 언니들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다 네가 괴물에게 잡혀간 줄 알았단다.”
“그래,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라면…….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어머니 아버지가 알면 정말 좋아하실 거야.”
프시케는 언니들에게 자신이 사는 궁전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성대한 만찬이 차려진 식탁이나 보석이며 값비싼 옷가지들로 채워진 방 등, 없는 게 없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공주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언니가 궁금해하며 물었습니다.
“그런데 네 남편은 어디 있니?”
프시케는 주저했습니다.
“낮에는 어디 있는지 몰라. 지금은 여기에 없어.”
“밤에만 온다고? 그러면 지금까지 얼굴도 본 적이 없단 말이니?”
언니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의심스러워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이상하구나, 프시케! 그 많은 밤 중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니? 너와 결혼했다는데도 말이야.”
“그래,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니?
공주들이 던지는 말 속에서 프시케는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편이 왜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불안과 의심의 싹이 틔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같이 지내면서 뭔가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니?”
“무슨 소리야, 이미 수상한걸. 혹시…… 정말로 괴물인 것은 아닐까? 널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프시케는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습니다.
“아냐, 괴물 같은 게 아냐. 분명 나랑 같은 사람이었어. 만져보면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분은 아닐 거야. 지금 이 궁전만 보더라도……. 언니들도 제피로스 님의 인도를 받아 여기까지 왔잖아. 신의 손길이 닿으시는 분이야. 이 모든 것도 신의 뜻이야. 그러니 나는 그대로 따를 거야.”
하지만 사실은 프시케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신탁은 분명 프시케가 신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밤마다 아주 다정하게 대해주는 남편,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에, 도저히 벌을 받는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남편이 자신에게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어느덧 돌아갈 시간이 되어 프시케는 언니들을 배웅했습니다.
“아무래도 네가 걱정되는구나, 프시케. 다음번에 또 만날 수 있겠지? 기다리고 있을게.”
프시케는 언니들을 안으며 생각했습니다. 나도 걱정돼. 내가 잘못되는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사실이 아닐까 봐. 내 마음과 믿음이 갈 곳을 잃을까 봐. 마치 이 꿈 같은 행복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
밤이 되어 침실에서 프시케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프시케를 품에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별 일 없었소, 프시케? 오늘은 즐거웠소?”
“네, 덕분에……. 아주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시간이 지나, 잠이 들었는지 남편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통이라면 그녀도 그에게 안겨 잠들었겠지만 프시케는 마음이 어지러워 잠들지 못했습니다.
프시케는 천천히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옆에 잠든 사내의 실루엣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놀라고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생겨난 남편에 대한 애정, 그로 인한 궁금증은 그녀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처음으로 겪어 본 사내. 그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과 체온, 아름다운 목소리와 고귀한 향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도 그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한번 원하게 되자 그가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더 많은 것들을 원했습니다. 남편을 더 알고 싶었고 그에게 더 사랑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끝까지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 그에 대한 야속함마저 들었습니다.
‘왜 얼굴을 보여주려 하지 않을까?’
그는 누구일까? 정체가 뭘까, 설마 언니들이 말한 대로 진짜 괴물일까.
그녀에게 얼굴을 보이려 하지 않는 이유는 괴물처럼 흉한 모습이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외에는 도저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그녀가 겁을 먹고 그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프시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거라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난 이미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는걸.
하루종일 당신을 내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어요.
꿈에서도 당신 생각을 해요. 계속해서 같이 있길 원해요, 영원히…….
결국 프시케는 결심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만약 그가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게 생겼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이제 자신은 그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를 사랑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를 사랑하리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멋대로 행동한 것에 그가 화를 낸다면…… 자신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용서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