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나라는 늘 싸우기만 했을까?/ 강창훈 글/ 책과 함께 어린이>
2013년 3월. 서울에서 파주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옮기는 분주한 와중에 전화를 받았다. 마감 독촉. 나는 머리를 조아리고 "죄송합니다"와 "내일까지 올리겠습니다"를 되풀이했다. 생각해 보면 결국 일이 늦어진 원인은 내 게으름이 일 순위일 것이다. 그다음은 자질구레한 그때마다의 상황이 있겠지.
이사한 다음 날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면서 마감에 짓눌린 마음이 좀 나아졌다. 천천히 걸으면서 처음 보는 동네 풍경을 감상하고 이마에 닿는 따뜻한 햇볕을 즐겼다. 그러면서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하여,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았다. 물론 과장된 마음이고 '조증'에 해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그땐 그랬다. 그리고 몇 번의 약속을 더 어기고 난 후 이 그림을 그렸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담당 편집자가 내 집으로 며칠 출퇴근을 하고 나는 피를 짜내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긴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유는 많았다. 가장 큰 것은 생계. 세 달 일해 한 달 사는 정도의 수입이었지만 여름이 지나면서 통장의 잔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다급한 마음에 돈을 구하려고 알아보다가 결국 대출을 받을 상황이 되었다. 비 내리는 장마 시즌에 반바지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은행으로 갔었다. 가는 길에 몇 번 미끄러졌다.
중국, 조선, 일본의 역사를 갈등이나 전쟁이 아닌 문화의 교류를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원고를 읽으면서 재미있었다. 인터넷도 신문도 없던 시절에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만나 뭔가를 주고받는 모습이 떠올랐다. 말도 안 통하는 상황에서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도자기, 종교, 음식, 혹은 어떤 이야기를 서로 공유하면서 지금의 한, 중, 일 세 나라의 문화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언젠가 외국여행에서 일본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 서툰 대화 중에 아톰, 마징가 Z 등에 관한 얘기가 나왔고 어린 시절에 본 것이라 "너도 그거 아냐?"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당연히 알지. 텔레비전에서 일본산 만화영화를 국내 것인 양 시치미 떼고 틀어주던 시절에 본 것인데. 그런 것들이 내 감수성을 형성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 작업을 하면서는 그림의 질에 대한 고민보다는 내가 과연 마감 날짜를 맞출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가장 많았다. 마감 일정은 못 맞췄다. 그러면서도 몇 장면은 잘 그리고 싶었다. 특히, 이 두 장의 그림이 그렇다. 봄에 마감을 약속한 일이 여름이 되어서 끝이 났다. 담당 디자이너와 문자로 대화를 하던 중에 "민망과 죄송^^;;"이란 말을 했다. 당시에 갖고 있던 블로그의 꼭지 타이틀이기도 하다. 내가 한 작업물과 감정을 기록하려고 블로그를 만들었다. 내 그림을 설명하는 메뉴가 필요했는데 타이틀을 정하지 못해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날 '민망과 죄송'이 마음에 들었다.
내게 일을 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많다. 드물게는 싸우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말 드문 일이고, 선천적으로 순한 성격 탓에 남들과 다투지 않는다. 그러면서 게으르고 내 '감'이 잡히지 않으면 일을 밀고 나가지 못한다. 갑의 입장에선 이런 내가 답답할 것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일을 했었다. 2013년에는 많은 일들을 중도에 포기했다.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됐다. 아마 뭔가 변화할 시기라는 징후였을 것이다.
돈을 잃고 생활은 막다른 곳으로 몰리면서 내가 그림으로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한 해.
2013년에 그린 그림 중 마음에 드는 두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