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정보들은 모두 인터넷에 떠 있다.
더 이상 정보는 지식이 아니다. 단편적인 지식은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 그런 시절이다. 구슬을 꿰고 정보와 정보를 이어나가야 문맥을 잡는다. 그것이 안다는 것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날은 비가 내렸다.
여름의 열기가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낼 즈음에 이곳에 왔다. 남쪽의 끝이다.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여섯 시간을 달려 왔다. 작은 읍내에 모텔이 줄지어 선 골목이 보였다. 그 골목으로 들어서자 곰팡내가 났다. 곰팡이 냄새는 208호실의 에어컨을 틀자마자 훅 들어왔다. 역겨운 냄새. 이 에어컨을 제대로 튼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불쾌한 냄새를 선풍기 바람으로 날리려고 했다. 처음 이 골목에 도착한 이후로 매일 선풍기를 틀고 잠이 들었다. 중년 사내 셋이 한 방에서 잤다. 서로의 코 고는 소리와 술 취해 흔들리는 모습과 땀내와 방귀 소리를 들으면서 여름을 보냈다.
햇빛이 등짝을 달구다가 그 열기에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할 무렵에 비가 내렸다. 아침마다 확인하는 일기예보에는 비 소식이 있었지만 점심 무렵에는 사라졌다. 그러기를 며칠 간 되풀이했다. 일을 마칠 무렵 갑작스런 소나기가 쏟아졌다. 지붕에 매단 물 홈통을 타고 쏟아지는 빗물에 손을 씻는다. 나이가 많은 목수다. 사실 집 짓는 목수를 '노가다'라고 해야 할지 '목수'라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목수의 모습이 있다. 목수의 이데아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목수의 태도와 솜씨를 갖추고 있어야 '목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그 외의 나머지는 노가다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
삽시간에 퍼붓는 비가 눈 닿는 곳마다 흘러 넘쳤다. 빗물이 차창에 붙어 늘어졌다. 갑자기 열기가 식었다. 끓는 듯한 더위가 가시자 세상이 변했다. 우리는 그날의 노동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빗줄기를 보면서 킬킬댔다. 그리고 밥을 먹으러 갔다. 어쨌거나 밥은 먹어야 한다.
비가 변화시킨 풍경을 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속이 시원해질지 생각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진작 갔겠지. 나른한 그리움과 소나기에 어울리는 감상이 차창을 닦는 와이퍼를 따라 오락가락했다. 우울은 아니다. 반복.
일그러지는 사방을 보면서 뛰었다. 뛰어봤자 젖는데도 뛴다.
순간의 모습이 있다. 어쩌면 나는 이런 것을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그림과 예술이라 불리는 동네 언저리를 맴돌았다. 한 번도 인정받지는 못했다. 자존심을 지키려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인정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엔 본전이 아까워서 일 것이다. 그 본전 생각이 노가다를 하면서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목수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지점이 내겐 우스워 보일 때가 있다. 본드를 적당히 얇은 굵기로 바르는 기술, 못을 삐쳐 나오지 않게 박는 요령, 톱을 어떤 각도로 뉘어야 잘 잘리거나 반듯하게 잘리는지를 아는 경험. 그런 것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각자의 몸에 익숙한 방식으로 하면 되는 것들. 별 차이 없는 것들을 강조하는 말들이 시큰둥하다.
그런 저마다의 방법들이, 제 손에 익숙한 요령들이 목수의 본질이 아닐 것이다. 제 몸에 맞게 하면 된다는 유연함과 상대에 대한 인정이 없다. 지긋지긋한 위계의 문화. 서열의 문화. 선후배의 문화. 그런 것들이 이 바닥에도 있다. 그런 모습이 느껴질 때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한심해진다. 집에 두고 온 아이와 아내가 생각난다. 이런 못난 모습에서 잘 벗어나는 방법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런 장면을, 그런 사람을, 그런 생각에 젖은 이들을 웃으면서 넘어설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비가 내렸고 잠시 속이 시원해졌다. 그런 날이 이번 여름에도 있었다. 초록으로 흠뻑 젖은 산과 논을 보면서 이 동네의 가을을 상상했다. 노랗게 물든 논과 단풍으로 얼룩진 산을 바라볼 때의 기분을 상상했다.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그리고 소나기가 그치듯이, 여름이 식어가듯이, 단풍이 선선한 바람을 따라 오듯이 시간이 흐른다. 계절이 간다. 2015년의 여름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