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간다. 이번엔 장흥이다.
먼 곳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번다. 어제는 우울했다. 10년 만에 이사를 하는 막내 처제를 보기 위해 아현동으로 갔다. 낡은 집과 낡은 골목과 낡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다. 동네 입구에는 새로 짓는 아파트들이 보였다. 재개발을 한다. 낡고 못생긴 것들을 밀어버리고 반짝이는 시멘트로 아파트를 짓는다. 보기 좋지는 않다. 오래된 골목마다 배어있는 이야기들이 갓 지은 아파트에는 없다. 편리함과 평당 가격만 남은 아파트이거나, 늙고 치매에 걸린 것 같은 연립이거나. 그래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살아간다. 나도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장흥으로 간다.
싫다. 이런 생활이. 방랑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일이다. 다른 재주가 없다. 돈을 만들 수 있는 재주. 사람들을 유혹하고 무언가 팔 수 있는 재주가 없다. 요리도, 말재주도, 똑똑함도, 눈에 띄는 재능도 없다. 그래서 노가다를 한다.
새벽 공기는 차갑겠지만 그래도 봄이니 얇은 잠바를 챙겼다. 가방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겨울 외투는 옷걸이에 두었다. 삼월 삼일 아침 여섯 시 반이다. 곧 일어나야 한다. 몸을 씻고 밥을 먹고 담배 한대 피우고 가자.
다른 모든 직업처럼 이 일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얽혀있다. 나와 비슷한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힘든 노동을 같이 한다. 그 안에서 서로의 감정이 얽힌다. 이번 현장이 내키지 않는 이유도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나와 팀장 사이에 말하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그는 나를 잘난 체 하는 정도로 보는 듯하다. 산청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밤에 팀장과 통화를 했다. 안부전화였다. 조합에서 하는 회의 내용을 알리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현장에 남아있는 팀장에게 고생하라는 말을 했다. 통화 중에 그가 회의 분위기를 물었다. 별 일은 없었고 듣기만 했다고 답을 했다. "떠르르한 분이 왜 말을 안 했어요." 팀장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웃으면서 그의 농담을 넘겼지만 그 말이 지워지지 않는다. 비아냥과 농담과 술주정이 같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불쾌하다. 가진 것도 없고 재주도 없다. 저도 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잘난 게 없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받아도 되는 건 아니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쉽게 상대를 재고 서로의 우열을 나누고 무시한다. 노가다판에서도 그렇다. 나이, 돈, 직업, 교육, 사는 동네, 키, 외모 등. 끝없이 비교하고 끝없는 열등감과 우월감에 빠진다. 지긋지긋하다.
출근 시간대의 전철. 열차의 맨 끝 칸에 탔다. 비어있는 자리가 있었지만 앉지 않았다. 옷이 가득한 가방을 벽에 바짝 붙여 내려놓고 문 옆에 섰다. 정거장을 지날수록 사람들이 불어났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좁혀지고 서로 몸을 밀어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랜만이다 이런 출근길. 딱 내 가방이 차지하는 면적만큼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다. 가방을 피해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벽에 손을 짚는다. 말은 안 해도 불편해한다. 나는 미안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짐칸이 좁기에 가방을 올리지 못했다. 홍대를 지나 서강대 역에서 우르르 내린다. 다시 공간이 생긴다. 조금 숨을 돌린다. 고속터미널로 가고 있다.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어깨에 맨 가방의 무게가 버거웠다. 매번 짐을 쌀 때마다 무게를 줄이려고 이것저것을 뺀다. 그러나 결국 같은 무게다. 작업복과 노트, 책 두어 권, 바지, 양말, 속옷, 세면도구 따위들.
터미널에 도착했다. 1,500원짜리 커피를 샀다.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섰다. 시골 노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새치기가 아닌 것처럼 새치기를 하며 내 앞에 선다. 잠깐 불쾌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장흥행 표를 끊었다. 26,700원. 가방을 둘러매고 게이트 쪽으로 갔다. 어깨가 버겁다.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담배 생각이 났다. 입구 쪽과 화장실 쪽을 살폈지만 마땅히 담배 피울 곳이 보이지 않는다. 전화기를 꺼냈다. 카톡 여덟 개.
"스톱."
"출발 금지."
"일정 연기."
"일요일 시작."
"출발 안 하셨죠."
폰에 찍힌 글자를 보다가 답을 하고 표를 환불했다. 담배가 땡겨서 승차장 쪽으로 빠져나갔다. 마땅한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대합실로 들어왔다. 떡볶이 가게가 보였다. 떡볶이 일인 분과 김말이 두 개를 시켰다. 매운 게 필요했다. 얼굴에 솟는 땀방울을 휴지로 닦았다. 지하철을 타고 아침에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갔다. 마음은 차분하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부글거리던 불쾌감이 누그러졌다. 왜 그리 짜증이 났을까? 아내에게 따뜻한 인사도 못하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헤어졌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이 있는 역에 내려 담배부터 꺼냈다. 두 개비를 피우자 마을버스가 도착한다.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소설을 읽었다. 몇 장을 넘기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