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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동 Sep 10. 2016

메모

1.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으로 "파주, 강릉"이란 글자를 창에 붙인 고속버스가 멈춰 섰다. 이번 여름에는 강릉에 있었다. 바다 구경도 한 번 못하고 일만 했었다. 날은 푹푹 찌는데 사람들과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서로의 미묘한 짜증들이 땀처럼 흘렀다. 태양만 이글거리던 텅 빈 하늘에 흰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 보이기 시작하니 하루가 다르게 구름의 양이 늘어났다. 어떤 날은 거대한 항공모함이나 우주선 같았다.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웃지도 않았다. 모두들 땀만 흘리지 서로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2.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시동이 되지 않거나 되더라도 얼어버린다. 2008년에 샀으니 이제 8년을 썼다. 그간 한 번도 말썽을 부린 적이 없던 든든한 놈이다. 처음 샀을 때는 내가 죽으면 같이 묻어달라고 했다. 좋아하던 기계다. 돈벌이도 하고 놀기도 하고 일기도 쓰고. 하루 중에 컴 앞에 앉아 끄적이는 시간만이 온전한 혼자의 시간이다. 맥주나 소주를 홀짝이면서 모니터를 바라보던 시간들이 나와 기계가 같이 놀던 시간이었다. 고쳐야 하는데 홍대까지 들고 갈 시간이 없네. 


 3. 추석 이후에 일할 곳을 알아보고 있다. 두 곳에 문자를 보냈다. 파주와 양평. 파주에서 시작하는 현장은 시큰둥한 반응이기에 접었다. 양평에서 일할 예정인 곳은 통화를 했다. 이것저것 묻는다. 대답하면서 사적인 얘기를 묻기에 좀 그랬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돼도 안 돼도 그만이다. 인연이 아닌가 보지. 


4. 철학자로 이름을 알린 사람의 소식을 봤다. 최근에 뭔 일이 있었나 보다. 그에 대한 비판들이 날카롭다. 공부 많이 하고 똘똘한 이들이 페북 타임라인에서 열을 올린다. 그 철학자에 관해서는 나도 몇 개의 기억이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는 그럴듯하게 시작하다가 피시식 김이 새는 느낌이었고, 그가 다른 매체에서 속시원히 풀어내는 말들은 흥미로웠지만 그것뿐이었다.  말이 멈추고 나면 뒷맛이 개운치 않았었다. 갸우뚱하면서 의심했다. 어쩌면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난 생각은 타인을 흔들어 깨우기도 하지만 눈을 멀게도 한다.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그는 처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아닐까.


5. 곧 추석이다. 계절이 너무 쉽게 변한다. 명절 전에 뭐라도 챙겨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능한 그런 일에서 멀어지고 싶다. 


6. 발가락에 난 티눈이 사라지지 않는다. 약을 바르고 살을  뜯어내도 그때뿐이다. 내 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뿌리를 내리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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