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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눌산 Aug 31. 2015

전기 없는 오지마을에 집 다섯 채를 지은 남자

경상북도 영양 새방골 이산뜻한 씨




‘하고 싶은 일’과 ‘살고 싶은 곳’은 언제나 만날 수 없는 오작교 같은 관계다. 하지만 까마귀와 까치의 도움으로 다리가 놓이고 그 다리를 건너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여기, 그토록 원하던 산중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산뜻한 이름이 없을까 생각하다 ‘산뜻한’으로 개명까지 한 이 산뜻한 씨는 전기도 전화도 없는 첩첩산중 오지마을에 혼자 힘으로 집 다섯 채를 지었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그의 집 짓기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미대를 나와 서양화를 그리던 그가 붓 대신 난생 처음 톱과 망치를 들었다. 뜻하지 않은 계기로 계획보다 10년이 앞당겨지긴 했지만, 도시와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내륙의 섬영양 일월산 자락 새방골 



지인이 건네준 명함 한 장이 그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더구나 앞뒷산에 빨랫줄을 걸어도 될 만큼 협착한 골짜기인 새방골에 들어서는 순간 내비게이션과 전화기도 먹통이 된다. 막막함도 잠시, 해발 1,218m 일월산 정상이 코 앞이라는 얘기를 들었기에 앞만 보고 골짜기로 들어가니 거짓말처럼 오롯히 자리 잡은 이산뜻한 씨의 흙집이 눈에 들어온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들었지요?”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이 골짜기의 주인 이산뜻한(45) 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미리 준비해간 오리고기와 매실주로 저녁상이 차려지고 순식간에 내린 어둠 속에서 주인공과 마주했다.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는 필자도 이런 공간이라면 밤을 새도 좋다. 더구나 좋은 친구가 앞에 있지 않은가.


취재가 목적이었지만, 평소처럼 펜과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 친구를 만난 듯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영양은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 살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살고 싶은 곳이 있어 봉화의 한 마을을 열 번도 넘게 찾아간 적은 있지요. 농촌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평생 도시에서만 살다 보니 땅을 사서 집을 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아랫마을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와 우연히 이 산에 약초를 캐러 왔다 이 땅을 발견했죠.”





딱 30년 만의 귀향이었다. 9살 때 형제들과 함께 대구로 유학을 떠나 서울에서 서양화가로 활동하던 이산뜻한 씨는 그렇게 고향 근처에 정착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먼저 고향집 인근에 2층짜리 흙집을 지었다. 부모님과 흙벽돌을 직접 찍었다. 무려 1만 장이다. 골조는 철골로 용접을 했다. 물론 전혀 경험이 없었다. 인터넷과 책을 통해 배운 게 전부다. 아직도 미완성이라는 그의 첫 집은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2년 동안의 경험을 살려 지금의 새방골에 네 채의 집을 더 짓는다. 굴삭기부터 샀다. 운전은 따로 배운 적이 없었기에 배우면서 했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집 다섯 채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혹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도시가 싫었어요.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인간관계가 가장 어려웠고요. 한마디로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까요. 나 자신을 혹사시키고 싶었어요. 그러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잊히지 않을까 해서요. 육체적인 고통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덕분에 지금은 많이 편안해졌죠.”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도시의 일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필자 역시 도시가 싫고 사람이 싫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나홀로 집 다섯 채 지은 서양화가



흙집을 둘러봤다. 초보의 투박함이 보이지만, 곳곳에 땀과 정성이 깃든 흔적들이 묻어 있다. 방바닥과 벽채, 천정에는 온통 흙을 발랐다. 2층에는 다락방을 만들고, 골짜기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테라스도 만들었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산이고, 계곡물이 흐른다. 있는 그대로가 자연이고, 정원이다. 그런데도 한 뼘만한 틈만 있으면 나무와 꽃이 심어져 있다. 자귀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느티나무...


“나무를 좋아합니다. 산 속이라 굳이 심지 않아도 되지만, 좋아하는 나무를 심고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더라고요.”


이산뜻한 씨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새방골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아니,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지금의 진입로 500m도 굴삭기로 손수 닦았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집도 있었고, 논도, 밭도 있었다고 한다. 그 흔적들 위에 이산뜻한 씨의 손수 지은 흙집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래전 사람의 손으로 직접 쌓은 돌담은 이산뜻한 씨가 지은 흙집의 기단이 되었고 담이 되었고 화단이 되었다. 바로 이 돌담들이 있어 이산뜻한 씨는 이 골짜기에 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랜 흔적들이 마음을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이 터를 보는 순간 마음이 끌렸어요. 땅 주인을 수소문해보니 다행히도 부모님 이웃에 사는 어르신이어서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었죠. 길도 없는 무성한 잡초만 가득한 쓸모없는 땅이라 다들 반대했지만, 제 눈에는 나름대로 그림이 그려졌던 모양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방송을 타게 되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늘었지만, 이제는,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개념 없는 사람들 때문에 속상하다. 그래서 그는 민박을 홍보하지 않는다. 돈을 버는 목적보다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도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조만간 개울 건너에 한 채 더 지을 계획입니다. 비용은 1,500만 원 정도 예상하는데, 지난 경험이 있어 좀 더 잘 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울 건너에 지을 집은 민박이 아니라 갤러리예요. 제 작품 활동을 하거나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작품을 전시하는.... 제 최종의 목표이기도 하고요.”





자신에 대한 혹사가 끝나지 않을 것일까? 그에 대한 질문에는 “이제는 안정이 됐다”고 했다. 그동안 미뤄왔던 본업인 그림 그리는 일도 시작할 계획이다. 그동안은 자연물이 주제였지만, 단조로운 산골의 풍경보다는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생각하기에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갖고 그림을 통한 계몽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특히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다. 시대상을 표현하고 싶은 생각에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방법은 찾지 못했다. 아마도 시대고발이 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랫마을에서 최근 추진하고 있는 문화마을 조성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재주를 살려 마을지도를 만들고 그림교실 같은 일을 할 예정이다. 


“닭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한  5년쯤 되지 않을까요? “했더니 무려 30년이란다. 적당히 크면 잡아먹어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보니 닭이 그렇게나 오래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낯설게 느껴진다.  


“닭을 좋아합니다. 녀석들을 관찰하고 있으면 그들만의 세계가 보이거든요. 부화하는 모습은 가히 경이적이죠.”


지난 6년 간, 도시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을 새방골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꽃과 나무와 닭들을 보면서, 또 자신의 육체를 혹사시키면서 그는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도시의 삶이 실타래처럼 얽혀 풀리지 않는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새방골로 달려가라고 권하고 싶다. 답은 쉽게 구할 수 없겠지만, 이산뜻한 씨의 사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보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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