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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Apr 22. 2024

아무튼 서태지 4-지극히 사적인,

아무튼 서태지-서태지는 왜 10집을 내지 않는가 챕터 202 

신비주의 서태지.

지금 읊어보면 참 촌스러운 개념이고 후진 전략이다.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갖기 위해 신비주의는커녕 일거수일투족을 소셜미디어 공개해 팬들과의 스킨쉽을 늘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된 요즘에는 말이다.


신비주의라는 것은 언론이 붙인 수식어였다. 서태지는 초기부터 앨범을 준비할 때 자신의 모습을 일절 미디어에 공개하지 않고 작곡과 녹음, 공연 준비에만 매진했고 컴백쇼 등의 특별한 이벤트를 열기 위해 비밀스럽게 행동했는데 그것이 방송, 신문의 눈에는 들지 않았다. 활동기와 공백기를 철저히 구분한 서태지를 향해 신비주의 벗어라, 신비주의 걷어라며 서태지를 공격했던 미디어의 행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1996년 1월, 은퇴를 감행하고 다른 나라로 떠나버렸을 때 이른바 '신비주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고유한 수식어가 되었다. 아무도 서태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팬으로서도 참 애가 타는 일이었다. 은퇴하자마자 결혼했다는 루머도 있어 친부모님이 해명해야 했고 (나중에 보니 때는 다르지만 결혼 경험은 사실이었다.) 미국 시골의 한 주유소에서 사장으로 살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팬들은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서태지를 그리워하며 많은 이야기를 창작해 냈다.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서태지를 만난 이야기, 아메리카 대륙을 헤매고 다니는 서태지 이야기 등등. (근데 아마 그는 다 해본 것 같다. 유럽도 가고 북미도 다 다닌 듯하다. 남미는 모아이 뮤직비디오 찍으러 굳이 가더라...) 은퇴생활 중 비밀스럽게 음악만 보내어 발매된 서태지 5집은 'Private Seotaiji'의 꽃이었다. 


2000년에 컴백해서도 이 드러내지 않기 전략은 줄어들지 않았다. 음악의 성격은 물론 밴드 구성 헤어스타일까지 모든 게 언론과 팬들에게 비밀이었고 컴백 공연에서 가서야 실제 모든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쉽게 인터뷰를 따고 오락프로그램에 섭외할 수 없는 그에 대한 언론의 공격은 더 심해졌다. 활동 뒤에 잠적하는 것도 여전해서 새 앨범을 들고 오기 전까지는, 컴백 소식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전까지는 여전히 팬들은 서태지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산다. 서태지 닷컴이 옛날 음악을 리마스터링 해서 업로드한다는 소식만 들려도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새 앨범 타령을 하는 것은 그게 아니면 그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일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왜 그랬을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굉장히 사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MBTI로 많은 걸 설명하는 시대니 이렇게 얘기해 보자. 그는 I. 극도로 Introvert 한 사람이다. (1년에 한 번 있는 크리스마스 편지에서 2023년에 그는 이것을 확인시켜 줬다. 그의 MBTI는 INTJ. 그럴 줄 알았어! 하는 것이 나를 포함한 대다수 팬들의 반응이었다.) 서태지는 천성이 조용조용하고 남의 방해를 받으면 일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며 혼자 있을 때 힘을 얻는 사람이다. 그도 몇 번이나 얘기했다. 신비주의를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고 자신이 그렇게밖에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방송에도 나가고 오락 프로그램도 하면서 곡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는 그렇지 못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 때는 앨범 활동기와 준비기(팬들에게는 공백기)로 시간을 칼로 자르듯이 나누어 컨트롤 했는데 그것조차 너무나 힘들어지니 은퇴하고 멀리 떠나면서 나중에는 어디 있는지 모르게 공간까지 구분해 버렸다. 


마케팅의 효과를 노린 목적도 물론 있었다. 사실은 은퇴를 앞두고 있던 1995년 1월에 씨네 21과 했던 서태지의 인터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꽃다발을 들고 갈 때 뒤로 들고 가지 보이게 앞으로 들고 가진 않잖아요. 앞으로의 일은 항상 비밀'이라고. (이 말에 설레는 팬들 중에는 나도 있었는데 그는 한 달도 안 되어서 은퇴를 선언해 버렸다. 앞으로의 일은 항상 비밀.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희귀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설왕설래와 기대는 하늘 끝까지 높아졌고 서태지의 음악, 패션, 공연 스타일, 찍는 광고 등이 일단 발표되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모두 화제에 올랐고 그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데뷔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그 후에는 사생팬이나 스토커를 막기 위해 소위 신비주의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2000년대 초 7집을 준비하던 당시, 방금 이사와 이삿짐을 채 풀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다른 장소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던 적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빈번하게 이사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스토킹의 경험은 Heffy End라는 7집의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음악에 잘 녹아 있다. 2013년 평창동에 주택을 짓고 가족과 거주를 시작한 것이, 성지였던 연희동 태지오빠네 집 이후 첫번째로 알려진 서태지의 대한민국 내 주소였다. 


나는 워낙 처음부터 성숙한 (?!) 팬이어서 사생팬 노릇을 한 적도 없고 연희동을 방문한 적도 없지만 평창동에는 한번 지나가듯이 보러 간 적이 있다. 정말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나름 서태지가 동시대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고 기뻐했고 살짝 대문만 보았으니 어른같은 행동이라고 자찬했는데 지금 그는 다시 그곳을 떠나 있다. 아마도 나 같은- 자신은 지나가듯이 슬쩍 보았을 뿐이라고 하지만 겪는 서태지나 가족들로서는 한두 명이 아니었을- 사람들이 힘들게 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이러한 지극히 사적인 성격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점점 스타들의 사생활, 사는 집, 가는 여행, 먹는 것까지 오픈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고 스타와 팬의 관계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변화의 와중에 서태지의 비밀스러운 삶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도 딱 알맞다.


대표적인 예는 아마, 절친인 (또는 절친이라고 우리가 생각한) 신해철이나 양군도 모르게 이루어진 그의 첫번째 결혼일 것이다. 결혼과 이혼이라는 인간의 중대사가 그토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할 정도다. 그 당시 그가 미혼이라고 생각하고, 연애하는 사이처럼 스타와의 관계를 상상했던 젊은 여성팬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만약 은퇴상황에서 결혼을 해서 신부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는 다시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그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그는 여전히 내성적이며 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팬들은 이런 성향을 잘 알고 존중해 주는 사람들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1년에 한 번씩 크리스마스 때 서태지 닷컴에 올라오는 글이 그에게 듣는 유일한 소식이다. 나같은 중년 팬들은 첫 번째 결혼과 이혼 소식이 같이 들려 2011년 대한민국이 또 뒤집어졌을 때도 '안 죽고 살아 있으니 됐지'라는 반응을 했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은 그가 구분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시기이다. 스토킹 없이 안전한 그의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고 있다면 팬으로서는 감사할 뿐이다. 



아무튼 서태지-서태지는 왜 10집을 내지 않는가

102: 서태지의 자연사랑과 방랑벽 - 프리스타일, 모아이, 숲속의 파이터

103: 서태지의 반항과 비판의식 - 교실이데아, 틱탁, 시대유감


201: 그가 이룬것은...

202: 지극히 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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