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배신

하고싶은 걸 할 수 없는 시간만 있더라

by OZ

"미안, 시간이 없었어"
최근 남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다.
"그래? 알았어"로 돌아오는 남편의 목소리.
다행히 언성은 높아지지 않았고 집안에 평화의 기운이 계속된다.
하지만 '속으로는 게으르다 생각하겠지' 괜히 멋쩍은 나는 눈치를 살핀다.
며칠 째 침대맡에 널브러져 있다보니 세탁기로 갈 애들인지 건조기를 다녀온 애들인지 분간이 안되는 옷들부터 음식물이 깨끗이 안 씻긴 그릇 그리고 현관 한켠을 채우고 있는 택배 상자까지...장소만 달라질 뿐, 우리의 대화 패턴은 비슷하다.


변명 같지만 정말 사실이다.
요즘처럼 내가 시간에 허덕이며 산 적이 없다.
'할일이 2배로 많으면, 4배로 부지런해지면 된다.'
잠을 줄이고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면 된다며, 바쁘다는 국회 출입 때도 거의 매일 데이트를 거르지 않았다. 연애는 물론 친구들이랑 놀 때도 '기자니깐 바쁘잖아' '시간 없을 거야' 이 말이 듣기 싫어 더 악착같이 움직였던 것 같다. 또 휴무일 땐 혼자 계신 엄마 적적할까봐 주말마다 고속버스 왕복 8시간을 다녔다. 분기별 일주일 씩 있는 강청 새벽기도도 빼먹지 않았다. 언제 쉬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꽉꽉 채웠던 24시간. 나름 쥐락펴락 해온 하루 하루, 24시간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안된다. 시간 관리의 틀이 무너졌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아이가 수시로 자 주고, 움직임이 적던 때까지는 괜찮았다.
아이가 잘 때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SNS도 하면 됐다.
그런데 기고 걷고 하면서부터는 달라졌다.
아이가 잘 때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장난감 정리도 이불 정리도 해야한다.
낮잠 시간 2시간은 똑같은데 해치울 일의 양은 늘어났다.
그런데 신기한 건, 해봤자 티가 안나는데, 안 하면 티가 확 나는 일들이다.
게다가 매일 반복되는 일들이다.
물론 좀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도 있지만 '빨리 끝내자'에 방점을 찍다보니 엉성한 부분이 늘어난다.

또 그렇게 겨우겨우 해치워도 그냥 당연한 거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 보상이나 정신적 기쁨이 크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일단 눈에 보이는 가사일과 육아를 끝냈다 하더라도, 시간이 없다는거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간은 있긴 한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시간이다. 오밤 중에 친구를 불러 수다를 떨겠나. 산책을 하겠나. 꽃구경을 하겠나. 그냥 자야지. 잠도 내 의지와 별개인 거다.


복직 전 여행 간 4일을 빼고, 난 출산 후 600일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내가 자고 싶은 만큼 자본 적이 없다. 내가 늦잠을 즐기거나 잠이 많은 편도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나 역시 침대와 한 몸으로 늘어지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남편이나 시어머니는 "쉬라고 할때 안 쉬었잖아. 자라고 했잖니." "말하지 그랬어?" 하며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나. 그들이 말하는 억울함보다 내 팍팍함의 무게가 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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