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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영 Oct 15. 2020

 장기하의 첫 산문집

 백 만년 만에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책 욕심은 참 많은데 정작 책을 펼치면 몇 줄 읽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집중이 잘 되지 않는 병 아닌 병에 걸렸다. 그래서 지금껏 읽고 싶은 책들을 수두룩하게 쌓아놓고선 다 읽지 못한 책들만 한가득이다. 그런 내가 정말 오랜만에 반나절만에 완독 한 책이 생겼으니 바로 장기하의 첫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이다. 


첫 프롤로그부터 내 얘길 해서 깜짝 놀랐다. 장기하도 나랑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었다. 


나는 책을 잘 못 읽는다. 일단 속도가 아주 느리다. 어떤 책인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몇 줄 읽다 보면 딴생각에 빠진다. 그것을 깨달으면 마음을 다잡아 다시 글에 집중해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또 딴생각. - 프롤로그 첫 줄


그는 정확히 내 증상을 설명해줬다. 읽으면서 나랑 똑같은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우린 왜 이런 증상을 겪고 있는 걸까. 전에도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그냥 추상적으로 머릿속에 생각이 많고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서, 라는 생각만 하고 있다. 여하튼, 그의 문체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처럼 담백하면서 위트 있었다. 이슬아 작가님의 추천사가 딱 적당했다. 

그가 쓴 문장은 싱겁고 단정하다. 그리고 이따금씩 애틋하다. - 이슬아 작가


    이런 그의 문체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술술 글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책 내용은 장기하의 얘기였지만 사실 나의 현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는 내가 선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유로우면서 많이 비우고 내려놓은 삶. 장기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10년 간의 인기 있었던 밴드 생활을 내려놓고 막막하고 불안할 걸 알면서도 1년 동안 창작 활동을 멈추고 그 후 조용히 솔로 활동을 준비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녔을 거다. 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자극들이 있었을지. 그는 담담하게 1년의 시간들을 기록했지만 이제 1달 반 째 쉬고 있는 나로서는 그 시간과 감정의 무게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무언가를 취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돈을 아끼고 말고 와도 좀 다른 문제다. 인생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데서 오는 쾌감이다. - p.79


자유롭다는 것은 곧 막연하다는 뜻이고, 막연한 삶은 종종 외롭다. 이끌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할 때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p.119 


막연함과 외로움은 정말로 내 선택에 딸려 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항상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장기하의 말처럼 따지고 보면 어떤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삶이 있겠는가 싶다. 누구든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란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과 안으로부터 솟는 의지, 이 두 가지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 p.58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것의 중요성을 한창 깨닫던 요즘이었다. 창작 활동의 원천을 멍 때리기라고 말한 사람은 비단 장기하뿐만 아니라 이상순과 김영하도 비슷한 얘길 했었다. (각각 '효리네 민박'과 '톡이나 할까' 참조) 하나같이 뇌를 쉬어주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떨어지는 영감들을 잘 기록하고 정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분명한 건, 그 시간 안에 나에게 떨어지는 것들이 꼭 있는 것 같다. 짧은 내 명상 경험으로는 내 감정 상태가 정확히 파악된다거나 지난날 왜 내가 힘들었는지 갑자기 이유를 알게 된다거나 혹은, 이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니더라도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거나. 그건 분명 요즘 같이 피곤한 시대를 사는 인간들에게 꼭 필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과 각종 IT기기들이 온전한 집중을 방해하는 요즘에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얼마 전, '톡이나 할까'에서 김영하가 그랬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고통받는 젊은이라면 매일 글을 써볼 필요가 있다고. 이 말들이 나에게 퍽 위로가 됐었다. 지금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조언들이어서. 매일 같이 글을 쓰고 명상하는 삶이 꼭 필요한 이유. 



책 초반에 장기하가 그랬다. 스스로의 기분이 어떤지를 잘 살피는 일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인생에서 '좋은 기분'보다 중요한 것은 별로 없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써왔고, 또 그게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는 프롤로그의 내용. 이 구절들이 책 한 권을 관통하는 메시지 같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대로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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