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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May 21. 2024

남편이 신발 밟은 사람을 경찰에 신고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파진다

저녁 8시경, 설거지를 하다 말고 불쑥 안방으로 들어가 누워있는 남편의 안색을 살핀 후 "몸은 어때?"라고 물어봤다. 체온이 어떤가 싶어 남편 얼굴에 내 볼을 맞대려 기울이다 보니 남편의 카톡창이 본의 아니게 눈에 띄었다. 연락을 하고 있는 친구는 결혼한 지는 조금 되었으나 이번에 예쁜 첫딸을 품에 안은 친구였다.


나는 아픈 게 안 나아     


라고 쓰다 재빨리 지우는 메시지.. 그리곤 다시 "좋겠네~~"로 바꿔 쓰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 친구의 일탈을 우연히 본 것처럼 봐선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당황했지만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곁눈질로 대화창을 빠르게 훑어보니 친구의 갓난아이 사진이 보였는데 제 딸을 처음 낳아 기르는 여느 부모의 자랑이었다.


"왜 썼다 지웠어~?"

"그냥~"    


씁쓸하고 착잡하고 입이 텁텁했다. 친구의 자식자랑 앞에서 본인 아픈 걸 말하고 싶을 만큼 이 사람의 마음에 여유가 한 톨도 없다는 생각에 측은함이 현기증처럼 감돌았다. 친구에게는 더없이 기쁜 탄생의 축복이, 우리에겐 초조하고 절박한 죽음의 불안이 더 가까운 상황에서 그대는 어떤 마음으로 그 글을 썼다 지웠을까?

위로받고 싶었지만 친구의 자식자랑 앞에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웃지 않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재발하기 전 한 달 전부터 웃지 않았다   


재발은 뇌출혈로 왔는데 전두엽에 계란만 한 악성 뇌종양이 있어 3개월도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던 남편의 첫 번째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수술 후 3~4개월 안에 80% 재발한다는 미친 확률도 잘 이겼으며, 누가 봐도 환자로 보이지 않을 만큼 좋은 상태로 우리의 반짝이는 여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남편은 너무나 '다정한 남편'이자  아이들의 '온화한 아버지'였고 부모님에겐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드리는 '상냥한 아들'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었으나 새 삶을 얻은 기쁨으로 "암에 걸려서 행복한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거야" 라며 연신 웃곤 하였다




남편이 변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큰 소리 낸 적 없던 5학년 딸에게 소리를 질렀고, 마트에서는 본인의 신발을 밟았다고 경찰을 불렀다. 남편은 잠시 마트에 가고 나는 주차장의 차에서 아이들과 대기하고 있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난데. 마트로 올 필요 없고 얘기 좀 들어봐"

"무슨 일 있어?"

"아니 지나가는 사람이 내 발을 밟았는데 신발이 더러워졌는데도 그냥 미안합니다 하고 지나가잖아? 이거 경찰에 신고해도 되는 거지?"


아. 일이 터졌구나. 내가 따라가야 했는데.. 일단은 상황을 모르니 그의 편을 들어줬다.

"응응 ~ 내가 갈게 잠깐만 기다려봐"

마트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 보니 저 멀리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경찰이랑 통화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신발부터 살펴보았는데 자세히 봐야 보일만큼 아주 희미한 자국이 보였다.


"아니 신발을 더럽혀놓고 그냥 죄송하다고 하고 가면 되는 거야? 내가 기다리라고 어디 가냐고 경찰에 신고한다 했더니 나를 무슨 미친 사람처럼 쳐다보면서 "마트에서 장 보고 있을 테니 경찰 부르세요"라는 거야. 경찰에 신고해도 되는 거지?"

집에와서 찍었던 사진


나는 서둘러 남편을 달래기 시작했다.

"신발은 내가 빨아줄게 여보 그냥 취소하자. 이거 내가 빨면 지울 수 있어"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경찰에 전화 걸어 출동을 취소했다. 아이들은 아빠가 경찰을 불렀다는 말에 영문도 모른 채 차에서 떨고 있었고 실제로 경찰이 마트 앞에서 되돌아갔다고 전했다. 그날의 남편은 매우 히스테릭해서 마트에서 지나가는 길이 조금만 막혀있어도 "비켜주세요!!"라고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남편 옆을 스치는 젊은 커플들이 본인들 머리에 손가락을 뱅뱅 돌리며 남편이 한 말이 따라 하고 조롱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멍든다는 걸.


집에 가던 차 안에서 남편은 앞을 가로막는 차를 향해 "씨발!!"이라고 소리를 쳤다.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아빠의 난폭한 모습에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시기에 아빠를 무서워하던 아이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아빠가 아파서..아파서 그래. 우리 조금만 이해해주자"였다.




재발된 부위는 측두엽으로 감정을 조절하는 부위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대로 감정조절을 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그간 남편의 욕설과 화, 신경질이 의사의 한마디에 모두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충동조절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거라 편을 들으면서도 아이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꾸짖었다.  


우리에겐 새 삶을 주셨던 의사 선생님이었고 이 의사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아이들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하고 빌었었다. 재발은 남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남편이 활짝 웃을 때는 내가 실없는 소리를 하며 으스대거나 누군가를 흉내 낼 때였는데 그마저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ps. 이 글은 23년 12월에 작성했던 글을 수정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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