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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Mar 22. 2024

아무도 날 대신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버틸 수밖에요


남편의 헛소리는 새벽동안 계속된다. 어눌한 발음으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걸어오거나 뭐가 보인다는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어 남편의 말이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면 쪽잠을 자다가도 "으응? 뭐 불편한 거 있어?" 하면서 벌떡 깬다. 어제는 새벽 내내 남편을 달래느라 거의 잠을 못 잤으므로 오늘은 까무룩 잤어야 할 텐데 왜 잠이 오질 않는지 테이프 감듯이 기억을 가만가만 되돌려보았다.


요새 세대는 테이프 감는 게 무언지도 모를 터인데 나도 이제 구시대 인간인 게 티가 난다. 구시대보다 친근한 아날로그세대라고 애써 단어를 매만지며 기억을 더듬어 본다.


'! 나 오늘 커피 마셨지. 그것도 아주 진-하게 두 잔.'


띵동. 문제해결.


상황이 해결되어 잠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의구심은 잠재울 수 있었다. 한잔은 호스피스 병동에 내려와 대접받은 드립 아메리카노였고 나머지 한잔은 남편의 지인이 사준 스타벅스 프라푸치노 라테였다. 남편이 평소 매우 아끼고 한때 직원으로도 데리고 있던, 남편보단 한 살 어리고  나보단 한 살 오빠인 지인이었다.



아끼는 동생이자, 직원이었던 그 지인은 어제의  통화에서 내게 "제발, 나 진짜 딱 한 번만 성찬이 형 볼 수 있게 해 주면 안 돼? 제발.."이라고 축축하고 애절한 음성으로 내게 빌었다. 나는 다소 냉정해 보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성찬이 오빠가 안 본다 하면 어쩔 수가 없어



이미 장성한지 한참인 어른이 울면서 내게 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나는 드라마에서 착한 주인공을 괴롭히기에 혈안인 싸구려 인성의 악역이 된 기분이 들었다. 정당하지도 당당하지도 그렇다고 괴롭힘에 당위성이 있지도 않은, 욕먹어도 싼 그딴 악역. 내 대사가 너무 불쾌해서 내게 빌고 있는 지인에게 측은함이 들었다. 대체 얼굴 한번 보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라고, 나는 그를 막고 있는가.




남편은 병에 걸린 후 첫 번째 수술 전 모든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과 인생에서 제일 친한 친구 한두 명 빼곤 모두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내향형인 I이지만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누구보다 E인 남편은 모든 모임에서 언제나 모임장을 자처했다. 남편의 주변엔 남편의 인간성과 리더십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남편이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겠다 선언했을 때의 행보는 파격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를 제일 잘 안다 자부했다가 이 선택 이후론 내가 그를 많이 모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나만큼 저 사람의 인생과 인성의 고저(高低)를 본 이가 있겠는가. 나는 남편의 밑바닥도 남편의 성공도 그리고 그의 성장과정 빼곤 팬티의 구멍까지 아는 여자였다.


 나와 남편은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점이 많았다. 특히 가치관 부분에서 비슷하여 큰 일 앞에서의 그의 선택은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칩거하다시피 하며 모두와 연락두절하는 일은  전혀 예측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남편이 내 예측과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와 가족에게 그동안 못해준 것들이 사무친다며 가족 이외에 아무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고 면회를 하기로 했다. 호스피스 병동을 올라가면서 택이 오빠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너무 놀라지 마. 그리고 너무 울지 마. 오빠 힘드니까" 병동에 들어가서 택이 오빠는 남편을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안부의 말을 생각도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울기만 했다. 한참을 울다 꺼낸 말은 "형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괜히 불렀다 싶었다. 남편이 너무 아끼던 동생이라 불렀지만 그 말은 꺼내서는 안 되었다. 남편은 눈을 감았다. 나는 계속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장난을 쳤다. "아유, 택이 괜히 불렀다 그렇지? 울기만 할 거였음 괜히 불렀어 저 푼수 떼기 괜히 불렀다" 나는 남편의 기분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남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계속 말을 했다. 택이 오빠는 "형 나 꼭 다시 올게"라는 말을 끝으로 면회시간인 30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울었다.


도우미 선생님께 잠시 부탁드리고 택이 오빠를 배웅할 겸 이야기도 나눌 겸 옆 병동의 스타벅스에 갔다. 연락을 끊겼을 때의 이야기, 수술, 재발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에 남편의 허락이 있으면 다시 보여주겠다 말하며 커피숍을 나왔다.


 헤어지기 전 택이 오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렇게 해?" 아마도 이런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남편을 달래던 내 모습을 보면서 놀란 듯 하였다. 난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어쩌겠어.
아무도 날 대신할 수 없는 걸.
내가 버텨야 하는 일이야"  



그렇게 그대의 간병이 참 힘들었지만 웃기도 했음을.

그대가 웃는 모습을 끝까지 볼 수 있음에 행복했음을.

보호자 침대를 바짝 붙여 곁에 누웠을 때 침상 밖으로 나온 그대의 손이 지친 내 볼을 쓰다듬었을 때의 그 감촉이 생경함을.

나는 자다 일어나 그대가 내 볼을 쓰다듬은 그 손을 잡고 "깼어?" 하면서 비빌 수 있었음을.

끝까지 그대의 이마에 키스를 할 수 있었음을.

그대가 죽는 날까지 팔에 난 생채기에 연고를 발라 줄 수 있었음을.

그대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상처가 낫길 바랐음을.

그대를 만나 행복했음을.


여보, 당신 만나서 그동안 나 행복했음을.  




ps. 이 글은 남편의 호스피스 전원을 가던 날인 3월 8일 기준으로 쓴 글을 수정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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