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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Mar 11. 2024

나는 지금 감정의 쓰레기 더미에 앉아있다


남편의 친구들은 내게 "대단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 씩씩하냐" 말한다. 그러면 나는

"그럼 어쩌겠어. 울고만 있을 수도 없고, 성격이 원래 씩씩한걸"이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내 친구들은 "답답하다. 너 괜찮니? 들어주는 것밖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라고 시무룩하게 대답한다.


시댁에선 "고맙다. 고생이 많다. 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한다, 네가 쓰러지지 않아야 한다. 힘들면 언제든지 전화하렴"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네네. 걱정 마세요.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오늘은 오빠 상태가 좋아요"라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친정엄마는 "참아라. 난 이해할 수 있다. 다 네가 참아야 하는 거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엄마에게 쏟아내고 싶었던 감정과 말을 멈추고 다시 삼킨다.


독자님들은 "힘내세요. 무엇으로도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남편의 회복과 작가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힘낼게요. 저도 독자님의 건강과 안온한 일상을 소망합니다"라고 기운 내서 말한다.


사실 내 상황에서 무엇하나 괜찮은 게 없는데 난 왜 이다지도 씩씩한 걸까.

아니면 씩씩하려 노력하는 건가?

씩씩하면 누가 상이라도 주는가?

내가 다 감당하면 내 수고를 알아주긴 할까?

아니면 온전히 내가 다 감당하는 게 맞는 일일까?

내 아이의 부모이기 때문에, 아픈 남편을 두었기 때문에 내가 다 감당해야 하는가?

남편이 죽으면 나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친정오빠부부는 날 보며 세상에 드라마가 필요 없다며 답답하고 울화가 치민다고 한다. 브런치에 개시하는 일은 내 인생의 5분의 1도 안된다. 나는 실제로 훨씬 더한 일도 많이 당했고 누가 들으면 진짜냐며 기겁할만한 일도 있다. 내가 겪었던 자극적인 일을 브런치에 소상히 올리기 시작하면 몇 개의 글로도 백만 뷰를 달성할 수 있다.



'남편이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자신 있어'의 단일 글이 단 2주 만에 10만 뷰가 넘었던 것처럼.


남편이 내게 했던 일들은 순화하고 순화해서 10의 1도 안될 만큼 적어 놓았다. 다 적어놓으면 이 사람이 너무 형편없는 사람이 될까 봐.

내가 여기저기서 당했던 일도 다 적지 않았다.

그럼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일까 봐.


아무도 모르는 내 비밀일기장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난 아무도 몰랐던 이곳에서도 체면을 차리고 있었다.


남편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얼마든지 불러주겠다고 종종 이야기하는데 그중 아가씨  이름을 가장 많이, 그다음엔 가족들을 부른다. 오빠가 동생을 부르면 아가씨는 해산을 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몸으로 남편을 보러 온다.


그런데 남편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 목록에 아이들이 불린 적이 없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내가 시켜야만 하고, 아이들도 내가 시켜야지 아빠에게 전화를 한다. 매일 저녁에 아이들이 아빠얼굴을 보겠다고 하는 영상통화도 내가 시켜서 하는 것이다.


"아빠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매일 영상통화하자"

아이들은 숙제처럼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병실은 상주보호자 1인만 있는 게 원칙이라 아이들이 출입할 수 없다. 그런 원칙을 위반해 가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아빠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들을 몰래 병실로 불렀다. 간호사 선생님 모르게 불러야 해서 첩보영화가 따로 없다.


아이들은 아빠의 얼굴에 얼굴을 비빈다. 그리고 2분도 안되어 다시 내보낸다. 나가던 와중에 예의 바르고 솔직한 첫째가 간호사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아.. 아니에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해버려서 들켰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하길 아무도 원한적이 없다. 나만 얼마 남지 않은 아빠와 아이들의 시간이 애틋했던 것 같다.


시어머님께 상주보호자 교대를 먼저 요구한 적이 딱 한번 있다. 내가 몸이 안 좋아서 하루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말씀드린 것 이외에 먼저 나서서 요청한 적이 없는데 시부모님이 나서서 앞으로 저녁에 병상은 본인들이 보시겠다 하셨다. 나는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데요"라고 걱정했다. 그리고 다시 3일 만에 말이 바뀌었다.

"네가 다 봐야겠다. 앞으론 전처럼 주말에만 바꾸자꾸나. 돈을 벌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지"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돈을 안 벌어서 남편을 봐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옹졸하고 치졸해지고 있다.

이건 내 마음의 여유가 조각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서도 시부모님께 섭섭하다 말을 드리지 못하는 내가 너무 멍청하고 바보 같다.

'나도 맘에 차는 며느리는 아닐 거야. 나도 모르는 새 시부모님께 상처드린 일이 많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벙어리가 된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도 아가씨가 내 글을 볼 텐데 하는 걱정이 든다.


일요일은 병원식당도, 근처 식당도 문을 닫는다.

아침에 배가 고파 나갔더니 이 근처에서는 서브웨이만 열었다. 밥이 먹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샌드위치를 먹었다. 저녁에 시누부부와 어머님이 오셔서 면회를 했다. 몸은 괜찮은지 밥은 먹었는지 남편에게 묻는다. 오빠는 밥이랑 약을 다 먹여놨는데 나는 못 먹었다. 원래라면 가족들과 같이 있었겠지만 몸도 마음도 허기가 져서 면회 온 가족들을 뒤로하고 나왔다.


내가 혼자 나와 밥을 먹는 사이, 독자분께서 직접 하루종일 만든 빵 40 여개와 스타벅스쿠폰, 정성스레 쓴 편지를 들고 병실로 직접 나를 찾아오셨다. 하필 내가 없어 나를 마주치지 못하셔서 너무 죄송했다. (이 일에는 사연이 있는데 감사하다고 글을 적다 버튼 하나 잘못 눌러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쓴 글이 날아가 버렸다.. 흑.. 혹시 이 글 보고 계신가요? 제가 연락처를 몰라서 감사의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ㅠㅠ글로 감사의 말 다시 적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시댁식구가 돌아가고도 한참을 그분이 써주신 편지를 응시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 말로만 힘내라고 말해서 죄송하다는 글을 재차 읽으며 한 번은 감사하고, 한 번은 위로받고, 한 번은 황송하고, 한 번은 두근거렸다.


부정의 감정이 휘몰아쳐서 소용돌이인 내 마음에 긍정의 감정이 섞여 들어갔다.


면회 온 어머님이 오빠가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지 안타까워하셨다. 내가 자리를 비운 한 시간여 가량 눈을 감고 있었다고 하는데 낮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남편이 왜 불러놓은 사람들을 두고 잠을 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도 맘이 울퉁불퉁해서 말이 불퉁하게 나갔다.


"오늘 낮에 하루종일 눈뜨고 있어서 피곤해서 자나 봐요. 이래놓고 새벽에 나 안 재울라 하지? 오빠 새벽에 계속 말하면서 안 자요. 지금 자지 말고 이따 자. 오빠, 나 새벽에 자고 싶으니까 지금 자지 말라고"


그리고 새벽 세시, 어김없이 남편은 두 시부터 눈을 떠서 뭐라 중얼거린다. 수박 달라, 커튼을 열어라, 침대를 세워라, 밖에 나가자, 여긴 어디냐. 침대자리는 언제 가냐. 말이 어눌해 정확히 말을 못 하는 남편에게 계속 다시 묻고 확인해 가며 남편의 의중을 파악한다.


우리 병상만 커튼이 다 열려있고 잠을 못 자자 간호사선생님이 들어오신다. "원래 이렇게 못 자세요?""네, 호스피스 병동 와서도 한 번도 제대로 잔 적이 없어요. 밤새 이래놓고 아침에 잠을 쏟아져서 자요""아.."


그 이후로도 남편의 말을 계속 받아주다 내 마음도 챙기고 싶어 병원복도로 나왔다. 오늘 새벽은 저 행동과 말을 더 이상 받아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복도소파로 나와 핸드폰으로 브런치에 글을 적는다.


내가 안 받아주자 허무하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내 인생도 허무하다고 받아쳐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프니까 내가 더 참는다. 그렇게 오늘도 내가 더 참았다.





복도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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