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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요 Feb 16. 2024

그땐 보이지 않고 지금은 보이는 것들

우리 아빠는 요리사예요

첫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 아이와 나의 대외적인 호칭이 달라진다. 나는 유치원생 학부모에서 초등학생 학부모로, 아이는 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이 되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그다지 다르지 않은데 한순간에 달라진 호칭처럼 많은 변화가 급하게 밀려왔다.


스무 명 남짓의 작은 학급, 같은 반 남학생 중 이름에 '주'가 들어가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주님을 찬양하는 이름이었는데 종교가 없는 나는 사고방식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그 이름을 듣고도 주님을 찬양하는 이름인지 몰랐다. 안면을 튼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갈 정도로 몇 번의 교류가 있었다. 두 번가량 만난 후 나와 딸아이를 교회에 전도하기 위해 집요하게 연락을 하시는 아이의 어머님에게 곤란한 마음이 들어 정중히 거절의 말을 드리고 거리감을 두기로 했었다.


아이는 당시 내가 느끼기에 좀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학교의 모든 행사에 아버님이 오신다는 점이었다.  어머님은 나가서 돈을 버시고 아버님은 항상 집에 상주하면서 아이들의 등하교를 책임지셨다. 학부모 참관 수업에도 아버님만 오셨고 보통의 경우는 그 반대였으므로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갔다. 


나의 엄마는 입학식과 졸업식에만 내가 다니던 학교에 오셨다. 내가 학생일 당시에는 부모의 열성이 지극할수록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쏟는 관심이 달라졌고 촌지를 받은 순서대로 수시를 써주던 못된 담임을 만났다. 나는 평범한 성적에 평범한 아이인 데다 부모가 학교를 들락날락하며 지대한 관심을 주지 않는 그저 그런 아이여서 그저 그런 대접을 받았다.


같은 반 아이의 엄마가 세련되게 꾸미고 학교에 와서 내 아이 잘 부탁한다며 선생님께 우아한 악수를 건넨다. 그런 날은 그 동급생 아이를 참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의 학교행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쁘게 입고 가겠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빠지지 않겠다고, 나의 결심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학교 행사에 절대 빠지는 일이 없던 나는 그 아이의 아버님과 자주, 빈번하게 마주쳐 짧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잠시 교류가 있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무례한 말이 없었는데 그때의 나는 전혀 악의가 없는 상태로 아이 어머님께 물었던 적이 있다.



학교 행사에 아버님이 주로 참여하시네요~?



"아 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어요"


사정이 도대체 무얼까 궁금해도 더는 묻지 않았다. 다행히 아주 최소한의 눈치가 남아있었다.


 사정이 무엇인지 그땐 짐작조차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있다. 그 아버님이 필시 아픈 환자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병은 하루아침에 나을 수 있는 가벼운 병이 아니었음을. 그래서 돈을 벌 수 없고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를 대신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의 등하교를 책임지고 학교생활에 보호자로 오고 가는 일임을, 시간이 지난 지금은 딱 아는 만큼 보인다.


시간이 흘러 이리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아버님의 안색이 창백하고 마른 몸에 딱 병자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를 전도함으로 영적인 구원을 얻어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본다.


 남편이 병환으로 경제에 관련된 생산적인 모든 일을 그만두고 집의 일만 돌보기 시작하며 집에 눌러앉았을 때 우리 아이들은 부모의 상황에 맞춰 도시로 이사를 왔다.


적응은 잘할까? 지방에서 왔다고 무시하지 않을까? 학교랑 선생님은 괜찮으실까? 여러 가지의 걱정 중 꽤 커다란 비율을 차지하는 하나는 다음이었다.


친구들이 아빠의 직업에 대해 묻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친구 누군가 , 혹은 수업에서 아빠가 하는 일이 뭐냐고 묻거든 우리 아빠는 요리사라고 대답하라고.


남편은 장사를 했지만 요리를 하고 여러 자격증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요리사의 자부심이 있었다. 결혼 전 다니던 한정식당(경복궁)에서 남편을 차기 부장급 요리사로 키우기 위해 해외파견을 제안했다. 겁이 많은 내가 외국에 같이 가지 않겠다 거절한 이유로 요리사로의 커리어를 접었다. 일본으로 가면 나와 헤어질 것 같단 이유였다. 그 이후로는 자주 다니던 단골호프집을 인수받아 25의 이른 나이로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남편을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장사한다는 말보다 요리를 한다 말했다. 그의 자부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일 년 동안 아이들은 아빠의 직업에 대해 말할 일이 없었다. 때론 아이들에게 부러 거짓말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거짓을 말하면 안 된다는 나의 육아 철칙에 철저히 위반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아빠가 아픈 불쌍한 아이의 프레임을 내 자식에게 씌우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은 아이가 크는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 같았으므로 아이가 거짓을 말하는 게 차라리 낫다 싶었다. 나중에 남편이 하늘에 가더라도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시킬 것이다. 우리 부모님 이혼했다고. 아빠가 죽은 불쌍한 아이의 프레임을 내 자식에게 씌우고 싶지 않으므로.


아들이 한 달 전 내게 "엄마~~ 친구가 아빠 무슨 일 하녜" 말을 한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아빠 요리사라고 했어. 근데 어디서 요리하녜"

"그래서 뭐라 했는데" 다시 물었다.


"응~  아빠 요리는 하는데 어디서 일하는지는 모른다고 했어"

"그랬더니?"

"아빠가 어디서 일하는지 모르는 게 말이 되냐 하던데?"

 "그랬더니 믿어?"

"믿는지 안 믿는지 잘 모르겠어~"

"잘했어! 아빠가 어디서 일하는지 모를 수도 있는 거지! 앞으로도 그렇게 말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안다. 내 아이는 친구들에게 아빠가 어디서 일하는 지도 모르는 칠칠맞은 아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짜 직장을 교묘하게 꾸며내어 정교한 거짓말까지 시키고 싶지 않다. 친구들이 적당히 에둘러 속아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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