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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로미 Sep 16. 2023

나의 은퇴일기

은퇴와 건강이야기 

나는 은퇴하면 여행을 원 없이 할 줄 알았다. 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방학 때만 여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수기의 비싼 비행기표를 울며 겨자 먹기로 샀고 덥거나 추울 때 여행을 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갔던 때는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 2019년이었다. 이 때는 연구년이라 비수기에 여행하는 여유와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건강이야기라 해 놓고 왜 여행이야기를 하는가 하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궁금하게 생각할 것 같다. 나의 여행 계획은 예상치 못한 건강 문제로 잠시(?) 브레이크가 걸려 있다. 그렇다고 뭐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제 장거리 여행은 당분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은퇴 전에는 은퇴 후에 막연히 나도 산티아고 순례기를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버킷 리스트까지는 아니었지만 자기의 본모습과 마주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듣고 나도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해인가 포르투갈의 브라가에서 열리는 학회에 가게 되어 간 김에 순례길 마지막 종착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게 되었다. 그때 조가비 징표를 단 순례자들을 보면서 몇 년 뒤에 나도 그런 모습으로 광장에 있지 않을까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순례길 걷는 것을 포기했다. 내 맘과는 다르게 나의 다리는 세월의 무게로 많이 지쳐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내가 건강할 줄 알았다. 내가 국민학교 (초등학교라고 바뀌기 전에 다녔기에 이렇게 표기함) 고학년이었을 때부터 나는 아침을 거르고 학교에 가곤 했다. 그때 아침식사를 거부하고 학교로 가는 내 등 뒤에 대고 엄마는 아침밥 안 먹으면 나중에 병이 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팠던 적은 거의 없었다. 중학교 때 수두 걸려서 얼굴에 딱지가 앉은 적이 있고 고 3 때 갑자기 몸살이 나서 하루 온종일 누워 있던 적이 내가 아팠던 유일한 경우였다. 젊었을 때는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리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건강상태가 양호해서 내가 항상 건강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는 것 같다.  그때는 젊어서 아픈 곳이 없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다가 40대 초반이 되면서 몸이 좀 힘들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보약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내가 내 발로 한의원에 찾아가서 보약을 지어먹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끔씩 팔, 다리, 팔꿈치 등이 아프기도 했다. 그때마다 정형외과 등을 찾아가서 치료를 해서 낫곤 했다. 그 이외는 크게 아픈 곳이 없어서 나는 정말 내가 건강한 줄 알았고 또 건강할 줄 알았다. 


50대 초반 갱년기가 되면서 나의 건강은 하나씩 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암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다가 암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항암치료도 하지 않고 내시경으로 간단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재발이 잘되는 암이라고 해서 처음 2년 동안은 3개월에 한 번씩 검사를 하다가 6개월, 1년으로 검사 주기가 길어지다가 몇 년 전부터는 따로 검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나는 무적함대가 아니라 거친 파도에 떠있는 작은 보트 같은 존재임을. 대수술을 해야 하는 암은 아니었지만 암이라는 의학용어가 주는 충격은 매우 컸다. 하지만 암진단을 받고 나서도 건강에 대한 나의 무지는 계속됐다.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온 지도 모르고 갱년기가 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내다가 건강검진에서 진단을 받고 지금껏 약을 먹고 있다. 그 이후로도 면역이 떨어졌는지 입 안에 백태가 끼기도 하고 군데군데 염증이 생기기도 했다. 한 여름에 운동을 하다가 부정맥 증상이 있었는데 그때는 단순히 더위를 먹었다고 섣불리 진단해서 큰일이 날 뻔도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원치 않는 훈장처럼 고혈압, 고지혈증, 당뇨 전단계 진단을 받았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나는 건강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런 질병들은 관리가 필요할 뿐 나의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작년 가을에 퇴행성 관절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전부터 무릎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었는데 그래도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서 열심히 걷기 운동을 했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작년 가을에 무릎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니 다른 어떤 곳이 아픈 것보다도 타격이 크게 왔다. 우선 기동성이 떨어지게 되니 엄청 우울해졌다. 팔이나 어깨가 아픈 것도 힘들고 내과적 질병이 있는 것도 힘들지만 다리가 아파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작년은 아직 은퇴도 하지 않은 시점이라 다리가 아픈 것이 너무 억울했다. 아직 은퇴도 안 했고 은퇴하면 여러 가지 계획한 일들도 많이 있는데 그걸 시행하기도 전에 다리 때문에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는 원망의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병원치료를 하면서도 정형외과 의사들과 물리치료사들의 유튜브를 보거나 또는 인터넷 검색을 해서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하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나의 경우는 무릎에 찬 물을 빼서 활액염을 없애고 근력운동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년 11월부터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열심히 대퇴사두근을 키우는 근력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절에 좋다는 보스웰리아, 콘드로이친, 가자추출물, 천심련 추출물로 만든 약들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꾸준하게 운동을 하고 관절보충제들을 먹었더니 이제 무릎 통증은 거의 없어졌다. 그래도 오래 앉아 있으면 무릎이 뻣뻣해지는 증상은 아직 남아있다. 얼마 전 남편과 오펜하이머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 상영시간이 3시간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뻣뻣해서 나도 모르게 절뚝거렸다. 이런 상태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이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더라도 가까운 일본이나 국내여행은 가능하겠지만 예전처럼 14, 15시간 비행기를 타고 유럽을 가거나 미국을 가는 것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비즈니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하지만 매번 비즈니스를 타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작년에 내가 은퇴도 하기 전에 다리가 아파서 엄청 억울해했었는데 사실은 그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퇴행성 관절염을 앓게 되는 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보다 더 일찍 병이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무릎이 탈이 난 이후로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걸음걸이를 보면 그 사람의 무릎 상태가 어떨지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텔레비전 건강프로그램에서 엄청나게 자주 퇴행성 관절염을 다루고 있고 또 홈쇼핑에서도 많은 관련 약들을 팔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걸 보고 심리학에서는 선택적 지각이라고 한다던가? 하여간 퇴행성 관절염은 나만 겪는 일이 아니었고 아주 흔한 질병이었다.  한 유튜브에서 어떤 의사는 이런 말까지 했다. 퇴행성 관절염은 장수의 저주라고. 하긴 평균수명이 37세 내외였던 조선시대에는 퇴행성 관절염을 경험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사망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여성의 경우 평균수명 86.5세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퇴행성 관절염을 겪지 않는 노인들이 더 희귀종일지도 모른다. 


주변에 보면 내 나이에 살짝 치매가 온 사람도 있고 나보다 훨씬 젊은 데 췌장암이나 유방암으로 먼저 세상을 뜬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그래도 나 정도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비주얼은 떠오르는데 정확한 이름이나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현상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치매가 아니라 "혀끝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입 안에서 단어가 뱅뱅 돌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현상에 붙은 재미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혀끝 현상"이 예전보다 자주 일어나기는 하지만 아직 치매는 아닌 것 같다.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수도쿠도 하고 새로운 언어도 배우려고 한다.  


은퇴해서 여유시간이 많아져서 운동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침마다 요가도 하고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근력운동도 한다. 최근에는 엄청난 경쟁을 물리치고 아쿠아로빅에 당첨돼서 일주일에 두 번 가게 되었다. 다행히 운동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 건강을 자신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에 최대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 또 주변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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