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첫눈(目), 첫눈(雪), 첫인상, 첫 경험, 첫날밤, 첫 키스, 첫차, 첫 대면, 첫걸음, 첫마디, 첫서리, 첫아이, 첫돌, 첫정, 첫 월급…….
첫머리에 첫 자가 들어가면 우리의 가슴은 설렌다. 어쩐지 순수해 보이고, 어쩐지 짜릿하다. 그것은 우리 마음가짐을 새롭게 만들고, 대상을 달리 보게 한다. 또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게 하고 긴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왜일까.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을 배운 적이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시.
이 시가 졸업한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유독 마음에 남아 있는 까닭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는 구절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달콤함도 아니고,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도 아니고, 날카로운 첫 키스라니!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말만 들어도 공연히 마음이 설레어온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이런 질문을 듣는다.
“너 무슨 재미로 사냐?” 혹은 “사는 거 재미있냐?”
그럼 이런 대답이 튀어나간다.
“재미는 짜샤, 넌 재미로 사냐?”
그렇게 눙치지만 문득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라 마음 한쪽이 짠해지고 허전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돌연 자신에게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쳐 낱낱이 제 모습과 주변이 드러나는 것 같기만 해서 몸이 움츠러든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건가.
사실 사는 일이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긋지긋할 때가 더 많다. 아침이 오면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안락한 이불속에서 나와 지옥철을 타야 한다.
출근길은 왜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 막히는지. 지각할까 조마조마 마음 졸이면서 겨우겨우 회사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는 산더미 같은 일거리들, 상사의 잔소리.
정신없이 업무에 파묻혀 있다 보면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어 동료들과 어울려 밥을 먹으러 간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둘러앉아 도시락 까먹는 재미만 하겠느냐만 그래도 하루 중 두 번째로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하고 나름 숨 돌릴 틈이 생기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즐거운 점심시간도 잠시. 상사의 잔소리와 일거리가 찬물을 끼얹는다. 다시 일에 파묻히면 드디어 출근하는 순간부터 기다려왔던 퇴근 시간이 되고, 그냥 가기 섭섭하여 동료들과 삼삼오오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피곤한 몸을 누이는 것도 잠시, 어느새 아침이 밝아와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 이 판박이 일상은 금요일까지 반복된다. 주말엔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티브이를 보거나, 아내와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나들이를 가기도 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네 번 보내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급날. 똑같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일임이 분명할 텐데 카드 대금은 한 달에 두세 번씩 나오는 것 같고, 월급은 몇 달에 한 번만 받는 것 같아, 이거 나만 속고 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내의 알뜰한 솜씨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한 달을 보낼까. 재주 좋게 월급을 잘 쪼개주는 아내 덕분에 여기저기 나눠 내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놀 것 등에 골고루 소비하면서 간당간당 한 달을 보낸다. 그게 12번 되풀이되면 해가 바뀌었다고 보신각에서 땡땡 종을 서른세 번 치고, 그러면 우리는 또 한 살 늙는 것이다.
올해도 그렇게 시작했다. 사는 게 이런 거였나 싶게 시시하기 짝이 없다. 뭐 재미있는 일 없나? 올림픽도 끝나고, 월드컵은 언제 오지?
그래도 다행인 것이, 사는 일이 개미처럼 부지런히 뭔가를 물어다 제 주변에 쌓아놓는 일 같아서, 그 지겹게 반복되는 일을 꿋꿋이 참아가며 열심히 핸드폰을 바꾸고, 자동차를 바꾸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면 일주일이 즐겁고, 한 달이 즐겁고, 일 년은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새 핸드폰은 계속 나오고, 새로 나온 자동차는 왜 또 그리 멋져 보이는지. 아파트 대출금 갚으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쑥쑥 커가고 통장은 늘 텅장이고.
정말 사는 게 재미없다.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고, 내일은 또 오늘의 반복일 게 뻔하다. 오늘 하루를 얼렁뚱땅 넘겨도 죽 떠먹은 자리처럼 표 하나 안 날 것 같은 그렇고 그런 나날들의 연속. 결국 우리네 인생이란 게 진부한 스토리로 흘러가는 3류 영화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세상만사 처음 아닌 것이 없다. 매 순간 째깍거리며 다가오는 찰나는 생전 처음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이고, 그렇게 지나가버린 촌음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결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 담그지 못한다고, 매년 같은 봄이 오지만 그것은 열 번째 봄과는 다른 봄이고, 스무 번째 봄과는 또 다른 봄인 것이다.
지금까지 순서대로 차곡차곡 스무 번째, 서른 번째 봄을 맞이했다고 해서 마흔 번째, 쉰 번째 봄을 맞이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지리멸렬한 일상들이 먼지처럼 쌓여서 마침내 이뤄내는 저 찬란한 봄을!
세상을 바꾸는 일은 참 쉽다.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오늘은 내게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남루하고 지긋지긋한 일상은 반짝반짝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어느 한순간 소중한 때가 아닐 수 없고, 어느 한 사람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언제까지나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고 긴장시키는 하루를 선물 받는 것이다.
가수 강산에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나.
“야호! 나는 살아 있네.”
봄이 또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