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란 정렬된 이야기다.
조직문화를 공부하다 보면 종종 '신뢰가 필수적이다.' 혹은 '신뢰가 선행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뢰'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애자일 컨버세이션>에서 더글라스 스퀴렐은 '신뢰'를 정렬된 이야기로 명명했습니다. '신뢰가 떨어져 있다' '신뢰가 없다'라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상대방과의 이야기가 정렬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행동과학자 크리스 아지리스는 그가 창안한 '추론의 사다리'를 살펴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추론의 사다리는 우리가 정보나 경험을 습득하는 것으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형화한 것입니다.
추론의 사다리
사다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정보에서 의미를 끌어냅니다. 의미는 가정이 되고 결론이 되며 신념(믿음)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형성된 신념(믿음)을 기반으로 행동을 결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사실이나 자료를 접했을 때 사람에 따라 취사 선택하는 데이터와 부여하는 의미가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아래 칸(관찰)과 가장 위 칸(행동)뿐이라는 겁니다.
이 차이를 해소하려면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대화를 통해 상대와의 이야기를 정렬해 나가야 합니다. 즉, 정렬을 통해 상대방과 동의한 스토리를 늘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신뢰한다는 것은 이러한 정렬을 통해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기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정신 모델'에 있다.
<학습하는 조직>에서 피터 센게는 훌륭한 아이디어가 실행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정신 모델'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정신 모델'이란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내면의 이미지입니다.
이는 그 사람이 입으로 말하는 내용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만 그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는 법이 없고, 항상 누가 자기 돈을 가져가지 않을까 싶어 걱정합니다. 사실 그의 정신 모델은 '사람은 믿지 못할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크리스 아지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지하는 이론(입으로 말하는 내용)에 맞춰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이론(정신 모델)에 맞춰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모델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방식까지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추론의 사다리에서 각자가 선택한 데이터와 부여한 의미, 신념과 행동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모델 자체가 옳고 그름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지하는 이론과 현실의 행동(사용하는 이론)의 격차를 인지하지 못했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진실되지 못합니다. 이는 당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상대방에게 전달한 말 혹은 당신이 던진 질문 너머에 있는 의미와 가정, 신념을 인식하여 설명하지 못한다면 대화는 정렬되기 어렵습니다. 상대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일어난 사건(관찰)과 당신의 행동뿐입니다. 이때 상대방이 봤을 때 당신을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암묵적인 가정 없애기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려고 합니다. 당신은 지금 강의실에서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 막바지가 되자, 학생 중 한 명이 손목을 흘끗 쳐다보았습니다. 이것을 본 당신은 그 학생이 강연을 지루하게 느끼고 있고, 빨리 끝나기를 바라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사실 학생은 손목을 쳐다봤을 뿐 손목시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손목이 가려웠을 뿐입니다. 혹은 오히려 당신의 강연이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질문을 하고 싶은 가운데, 주어진 시간 내에 적절한 질문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 따져보기 위해서 시간을 체크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수만 가지의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손목을 쳐다본 것을 한 가지 가정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이자 <Thinking Fast and Slow>의 저자인 다니엘 커너먼은 이를 'WYSIA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이라고 말합니다. 해석하면 '당신이 보는 것이 전부다'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에만 근거하여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즉시 존재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인지 편향을 말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에는 두 가지 시스템의 조합으로 작동합니다. 제1시스템은 빠르고 자동적이고 무의식을 담당합니다. 제2시스템은 느리고 의도적이며 노력을 수반하는 영역입니다. 여기서 제1시스템은 스토리텔러입니다. 정보가 희박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경우에도 사용 가능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고의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즉 'WYSIATI'는 우리가 가진 정보를 유일한 정보인 것처럼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직접 관찰한 것(구체적인 데이터)을 별다른 검증 없이 일반화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터 센게는 이를 '추상화 비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추상화 비약은 암묵적인 가정을 만들어 내고, 진실을 왜곡하고, 투명함을 없애며,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신뢰를 쌓거나 혹은 회복하려면 가장 먼저 이 추상화 비약으로부터 오는 '암묵적인 가정'을 깨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방법 1 -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
암묵적인 가정을 깨트리는 첫 번째 해결법은 미국의 심리학자 마셜 B. 로젠버그 박사의 'NVC(Nonviolent Communication: 비폭력대화) 모델'에서 가져왔습니다. 로젠버그 박사는 관찰, 느낌, 욕구, 부탁이라는 4가지 요소 중에 첫 번째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를 제안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찰'이란 평가와 섞이지 않고 분리된 관찰을 말합니다.
로젠버그 박사가 말하기를 '관찰'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려 할 때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이를 평가와 섞어서 전달하면 듣는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오히려 우리가 전달한 말을 비판으로 받아들이 쉬우며, 저항감을 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주 단적인 예로 "그는 시간 개념이 없다"가 아니라 "그는 지난 세 번의 약속에서 모두 30분이 지난 후에 왔다."라고 말하는 것이 평가와 분리된 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 평가가 섞인 관찰과 평가와 분리된 관찰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방법 2 - 순수한 질문하기
더글라스 스퀴렐은 신뢰의 두 가지 요소로 투명성과 함께 '호기심'을 얘기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방에게 '순수한 질문(Genuine Question)'을 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는 조직심리학 박사 Roger Schwarz의 <8 Behaviors for Leading a Smarter Team>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순수한 질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말로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 한다.
대답이 여러분을 놀라게 할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질문의 대답 결과 여러분의 관점이나 행동을 바꿀 의지가 있다.
반대로 '순수하지 않은 질문'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보다 주장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또한 어떤 의도를 숨기고 있거나 특정 반응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한 대화 내용을 돌이켜보면서 '내가 한 질문은 순수한가?'를 되짚어 보라고 합니다. 이때, 질문의 표현 자체만으로는 순수한 질문과 순수하지 않은 질문을 구분할 수 없으며, 둘을 구분하려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질문자의 생각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다음은 순수한 질문과 순수하지 않은 질문을 비교할 수 있는 대화 예문입니다. <애자일 컨버세이션>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왔습니다.
순수하지 않은 질문들로 이루어진 대화 순수한 질문들로 수정된 대화
지금 이 대화 예문 사이에는 '순수한 질문' 외에도 다른 많은 대화 스킬들이 들어가 있습니다만, 우선은 노버트가 한 '질문'에만 집중해서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표에서 알 수 있다시피 오른쪽이 둘 간의 대화이고, 왼쪽은 노버트의 생각과 느낌입니다. 원래의 대화 예문과 수정된 대화 예문을 살피면서 노버트가 질문에서 자신의 의도나 욕구를 숨겼는지 혹은 드러냈는지를 잘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대화 예문을 보면 순수한 질문인지 무엇인지가 더 선명해지면서 동시에 예전에 '내가 던졌던 질문들'이 스쳐 지나갈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내 의견과 요구사항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을 세워놓은 상태에서 상대방을 비꼬거나 혹은 다른 반응을 유도해서 논리 싸움에서 우위를 가져가려고 했던 적이 있으실 겁니다(물론 저 또한 많이 그랬고, 아마 지금도 종종 이렇게 질문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땠나요? 아마 말싸움에서는 이겨도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