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3. 외부 조직 코칭하기
설명에 앞서 복잡계에 대해 서술한 글들을 읽고 오시면 이해하는데 도움을 될 것입니다.
1편. 요즘 조직문화를 이해하려면 알아야 할 '복잡계' 이론
2편. 복잡계 이론으로 의사결정하기: 크네빈 프레임워크
저는 비록 HR 담당자나 기타 관련된 담당자로 일하진 않았지만 조직 내부에서 '변화 대리인(Change Agent)'로서 꾸준히 조직을 개선해 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다른 조직을 코칭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대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뉴미디어 스타트업이었지만 연차는 꽤 오래된 기업이었습니다. 시작은 제가 이전 회사에서 구축했던 업무 시스템을 해당 조직에 적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시스템이라 함은 간단히 말하자면 노션 툴을 기반으로 발행 콘텐츠부터 외주자 커뮤니케이션 및 정산까지 일원화해서 관리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번 사례 소개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하튼 대상 조직이 바랐던 것은 조직의 '효율화'였습니다. 사실 저는 '효율화'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이면의 숨어 있는 문제들이 많겠구나' 예상했고, 그것은 적중했습니다.
우선, 제가 이전 조직에서 사용한 툴을 그대로 들고 오기만 한다고 해서 대상 조직에서 원활히 돌아가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았기에 경영진 분들께 구성원 분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요청을 드렸고, 다행히도 긍정적으로 수락해 주셨습니다.
제가 구성원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처음 한 질문들은 "저라는 사람이 와서 이러한 것들을 진행한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되셨나요?", "경영진이 요청한 것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서로 논의를 한 적이 있나요?", "평소 이러한 부분에 대해 개선이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누구한테 가서 어떻게 얘기를 하나요?"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의뢰받은 '조직의 효율화' 작업은 애초에 성공하기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왜냐면 이 작업이 왜 필요한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맥락이 공유된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것을 받아들여서 업무의 방식이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은 구성원들 당사자인데도 말이죠.
인터뷰 초반 조직의 소통 부분에 있어서 이슈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조직이 본질적으로 어떤 문제를 앓고 있는지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영진이 요구한 사항 그리고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생각 사이의 괴리를 통해 제가 발견한 대상 조직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보였습니다.
1) 조직의 개선 혹은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공간이 부재하다.
2) 조직의 관심사가 지나치게 '효율화'에 집중(매몰)되어 있다.
1)의 경우, 지난 글에서도 설명했듯이 어떠한 직접적인 솔루션보다도 해당 주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면 예상외로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조직 또한 이러한 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입을 닫고 암묵적인 가정을 한 채로, 서로에 대한 편견이 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2)였습니다. 조직을 관찰하고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은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대신 '효율화'란 단어가 조직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리더들은 물론 구성원들 또한 '효율화'란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보다 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갖추길 원하고, 좋은 툴을 사용해서 마법처럼 문제를 해결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효율화'는 조직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조직이 완벽하게 효율화를 성공한다면 기업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완벽한 효율화라는 게 뭘까요?
그래서 보통은 이런 경우 제가 물어봅니다. "무엇을 위해서 효율화를 하고 싶으세요?" 이에 대해서 Why를 거듭해서 여쭤보면 어느 순간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분명 조직이 처음 시작했을 때는 해결하고 싶었던 고객의 문제가 있고 우리가 해내야 할 미션이 존재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직원 수가 늘면서 하루하루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우리는 금세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까먹곤 합니다.
대상 조직 또한 비슷했습니다. 조직 내에 가장 중요한 발화들이 오고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가 이 문제가 맞을까요?", "이게 정말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거 맞나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죠?"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전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복잡한 영역의 문제들입니다.
이제 문제를 알았으니 해결할 차례가 왔습니다. 대상 조직은 원래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의 복잡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이를 위해 명확한 해결 방안을 기대하는 습관이 생겨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조직의 관심사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끌개(attractor)'가 필요했습니다.
생각보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대상 조직의 여러 가지 제품들을 놓고 제품의 미션을 다시 한번 정의해 보고 토론해 보는 '제품 미션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위는 제가 임의로 만든 간단한 프레임워크입니다. 위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각각 User Problem, Business Problem, Experience/Value로 나누어져 있고, 각자의 의견을 담을 수 있도록 포스트잇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User Problem은 제품이 해결하고자 하는 고객의 문제이며, Business Problem 사업적으로 해내야 하는 과제들이 됩니다. 이를테면 분기 매출이 될 수도 있고, 팀이 갖고 있는 역량과 자원이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즉, Business Problem은 User Problem을 해결할 때 함께 고려해야 하는'제약들(Constraints)' 또는 현실적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Experience/Value는 User Problem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이 제공해야 할 경험과 가치로 이것이 곧 제품의 미션이 됩니다. 토론의 최종 산출물을 솔루션으로 정의하지 않은 이유는 섣부른 솔루션에 대한 확신이 진짜 유효한 솔루션의 등장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의 올바른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 '명시적 교습'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서브를 할 때 무릎을 좀 더 굽혀" 또는 "발을 어깨너비로 벌려야 돼"와 같은 지시는 오히려 선수의 움직임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복잡계를 이해하고 있는 코치라면 '비유'를 활용합니다. "무지개 모양으로 스트로크를 하면서 쳐봐!"(테니스), "높은 선반에 놓인 항아리에 쿠키를 던져 넣는다고 상상하면서 움직여봐!"(농구)와 같이 말이죠. 이때 이러한 비유들은 선수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고, 선수 스스로가 움직임을 찾아가면서 자기 조직화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제품의 형태, 솔루션을 고정시키기보다는 그보다 앞선 전제, '가치' 또는 '경험'을 정의하면 이를 충족하기 위한 다양한 솔루션을 실험해 볼 수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솔루션, 툴, 방법론, 프레임워크 같은 것들부터 얘기하는 방식은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단순화시켜 버릴수 있습니다.
물론 위 방법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과정을 도와줄 수 있는 툴은 많습니다. 짐 콜린스의 고슴도치 컨셉(Hedgedog Concept)이나 JTBD(Jobs to Be Done)를 활용해 볼 수 있으며, UX 리서치 방법론이나 경험 디자인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방법을 쓰는지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잊어버렸던 문제의 복잡성을 재인식하는 것이었고, 해당 워크숍은 충분한 결과를 이끌어냈습니다. 몇 시간밖에 투자하지 않았음에도 구성원들은 3가지 항목에 대해 토론함으로써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그러므로 우리가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나눠야 한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이날 이후 슬랙에는 구성원들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고객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아이디어들이 올라왔습니다. 덧붙여서 고객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고 방법론을 찾아오거나, 자신이 발견한 인사이트를 따로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하지만 툴을 벗어나 면대면으로 만나 대화하는 빈도도 많아졌습니다.
결과적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이나 이를 도와줄 수 있는 툴은 중요도에서 멀어졌습니다. 왜냐면 진짜로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고객의 문제, 우리의 미션 같은 것들을 얘기하려면 온라인상의 툴에 의존하기보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고,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동기화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대상 조직의 코칭을 마친 후 저에게 날아온 피드백은 놀랍도록 긍정적이었습니다. 저는 유용하다고 소문난 툴, 방법론 중 어떠한 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어떻게 해야 조직이 변화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툭하고 눌러줬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모두 복잡계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David J. Snowden and Mary E. Boone (2007), <A Leader’s Framework for Decision Making>, HBR
피터 센게 (2014), <학습하는 조직>, 에이지21
Jurgen Appelo (2012), <How to Change the World: Change Management 3.0>, Jojo Ventures
롭 그레이 (2023), <인간은 어떻게 움직임을 배우는가>, 코치라운드
테니스 이너 게임 (2022), <테니스 이너 게임>, 소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