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에세이 [EP1]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TV 속 다큐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의 크기가 우주의 티끌만 하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충격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린 나이에 주변의 세상이 얼마나 크게 보였겠는가. 그 시절의 나에게는 적잖은 생각을 들게 한 것은 분명하다.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집 근처 동네를 벗어나 걸어서 15분은 넘게 걸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기어이 차를 타고도 왕복 8시간은 걸리는 서울의 대학교에 가기까지 내가 알던 세계는 점점 넓어지고 변화했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가지 못했던 곳을 갈 수 있게 된 나는 자연스럽게 숨겨진 의미와 가치는 잘 몰랐지만 자유란 것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지구의 크기는 우주의 입장에서 작은 점만 했겠지.
대학교에 들어간 후, 한국을 넘어 해외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해냈던 사람들이 부러웠다. 인생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안 것도 그때쯤이었을까.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때, 주위를 돌아보게 된 것도, 그 결과 내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받고 살아왔다는 것을 안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때도 지구의 크기는 작은 점만 했겠지만, 내 지구는 조금 커진 느낌이었다.
난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자만의 지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고, 비유적이라고나 할까. 사람은 태어날 때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몸과는 전혀 다른 육체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육체에는 부모의 DNA가 섞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성격과 정신이 자리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바라보는, 느끼는 지구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지구와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7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70억 개가 넘는 지구. 많아 보이지만 이 지구들을 모아도 우주를 꽉 채울 수는 없다. 그렇다. 우주의 입장에서 지구는 티끌만 하니까. 밤하늘에 별처럼 작은 점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그랬을까. 우리는 자주 우리의 지구를 과소평가한다. 가까이 서보면 그렇지 않은데도 작다고 폄하하고, 너무 작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되뇐다. 혹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주위의 평가에, 사회적 시선에 휩싸여 행동을 제약당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밟고 서있는 지구가 너무나 작아서 우리가 발버둥 쳐도 우주에 한 톨의 영향을 줄 수 없어도, 우리가 나아가길 주저할 이유는 없다. 각자가 가진 지구는 멀리서 보면 같아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대체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있으니까. 오히려 작기에 작고 볼품없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은 한 없이 펼쳐져있으니까.
생각을 뒤집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구의 가능성을 미리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도 모르는 새에 남들의 지구를 보고 내 지구의 한계를 정해버리진 않았는가. 내 지구가 과거에 그리고 현재에 원하는 만큼 아름답지 못하다고, 찬란하지 못하다고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까지 재단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본질적으로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남에게 부여받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니체는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왜’라는 의미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의 자유다.
『 죽음의 수용소 』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각자가 가진 자유 위에 세워진 개개인만의 지구를 빼앗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내 지구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으니까. 이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구를 더 이상 작은 점이라고 부를 수 없다.
나만의 지구, 나밖에 만들 수 없는, 자유 의지로 선택한 지구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점에서 벗어나 각자가 행복한 우주먼지가 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할 때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작은 점일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작은 점이기에 작은 점이 무슨 짓을 하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있는 힘껏 전심전력을 다해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지구를 꽃피워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이곳은 암흑 속 외로운 얼룩일 뿐이다. 이 광활한 어둠 속의 다른 어딘 가에 우리를 구해줄 무언가가 과연 있을까. 사진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까?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 Carl Sagan 『 Pale Blue Do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