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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Dec 30. 2019

부모로서 때로는 지나침보다 모자람이 나을 때도 있더라

육아 에세이. 과유불급,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육아도 마찬가지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12월 7일 토요일 강릉 장로교회 TG 홀에서 영동극동방송 어린이 합창단 정기 연주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하랑이와 예람이를 데리고 처음으로 문화 공연을 함께 관람하는 것이었다. 격조 있는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자녀에게 제공하고 싶었다. 좋은 아빠로서 이제 슬슬 시도해 볼 만한다고 여겼다. 나름의 판단 근거는 있었다. 하랑이는 어린이집에서도 가끔 뮤지컬 공연에 가고 했으니 가능할 것이다, 예람이는 누나 따라쟁이니까 옆에서 누나가 열심히 보고 있으면 같이 잘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었는데, 확실히 그때는 확증 편향적이었다. 희망적인 면만 보려고 했으니 말이다.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이들이 연주회에 흥미가 없어서 로비에서 뛰어노느라 장내에서 연주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정도?


뚜껑을 열어본 후 집에 와서 결심했다. 당분간 그 뚜껑은 닫아놓기로. 내가 오늘 너무 섣부르게 열었다 된통 당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초반 30분은 연주회장 안에서 잘 버텼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하여 하랑이에게는 빵을, 예람이에게는 두유를 줬다. 그리고 결국 나가 놀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생기발랄하게 잘 뛰어놀고 있는데 돌발 상황이 생겼다. 갑자기 예람이가 로비에서 토하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두유를 먹고 소화를 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황급히 화장실에 가서 대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고 예람이 옷에 묻은 토도 박박 문지르고 치우는 등 정신없이 뒷수습을 했다. 이때 집에 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참아보기로 했다.(인터스텔라처럼 블랙홀 너머의 5차원 공간에서 또 다른 박태성이 나에게 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을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연주회를 끝까지 완주해 보자, 이 경험치가 아빠로서 날 더욱 성장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등록할 때 스태프분이 이야기했던 경품 추첨에도 마음이 혹했다. 55인치 TV라니! 혹시라도? 참고로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똥 손”이다. 가끔 마트에서 3만 원 이상 구입한 손님을 위한 사은품 이벤트를 하면 나는 99% 꽝이었다.(어쩌다 한 번 2입 키친타월을 받아온 적이 있다. 그거라도 받았으니 똥 손 아니지 않냐라고 말하면 음, 좀 비참하다.) 이것 말고도 여태 내 인생에서 학교나 교회, 무슨 행사할 때 경품 추첨을 해서 뭘 받아본 적이 없다. 나의 그런 전적이 쌓일 때마다 우리 아내는 자기는 나름 금 손인데, 나는 똥 손이라고 놀린다.(실제로 우리 아내는 결혼하기 전 사내 체육대회에서 경품권 추첨을 하면 태블릿이나 기타 물품 등을 받아오곤 했다.) 그런 똥 손이 그날 갑자기 왜 경품에 욕심을 내서 미련한 결과를 불러왔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당시의 나 자신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아무튼, 1차 토 사태를 마무리하고 다시 연주회장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목마르다고 하여 정수기를 찾아보았는데 종이컵도 없고, 물도 안 나아오고. 가면 갈수록 칭얼거림의 데시벨은 올라가고.(왜 물통을 안 챙겼을까!) 결국 고육지책으로 화장실에 가서 손에 물을 담아 목을 축이는 정도로 갈증을 해소하게 했다.(아빠 맞니?) 집에 갔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막바지에 가서는 거의 다 늘어졌다. 그래도 합창단 친구들이 앙코르 송을 부르고 경품 추첨을 시작할 때까지 끝내 자리를 뜨지 않았다.(근성의 한국인이여!) 하지만 역시 똥 손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역시나 꽝이었다. 그럼 그렇지, 쓰게 웃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애들한테도 미안해하면서 칭얼거리는 예람이를 안고 연주회장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아뿔싸, 뭔가 뜨뜻한 것이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것이다. 2차 토 사태였다. 예람이가 또 토를 시작하고 있었다. 급하게 화장실로 직행하여 내 옷, 예람이 옷, 내 신발, 화장실 바닥을 다시 한번 다 문지르고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도록 정리했다.(이 글을 읽는 강릉 시민이 있어서 TG 홀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2층의 남자 화장실에 대걸레가 있다. 앞으로 이용할 일 있으면 참고하시라.) 그렇게 연주회 일정을 마치고 옷 곳곳에 풍기는 토 냄새를 만끽하며 차를 타고 집에 왔다. 정말 판타스틱한, 토 나왔던 토요일이었다.


#1 연주회 초반에는 이렇게 활기찼던 아이들이......
#2 막바지에는 이렇게 되었다. 다 내 탓이다......




이 일을 겪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하랑이와 예람이가 커가면서 그들의 삶에 욕심을 과하게 부렸다가 오늘처럼 잘못되면 어떡하지, 내 욕심 때문에 토요일 저녁 하랑이와 예람이를 너무 고생시켰는데. 물론 자녀의 성장을 위해 부모가 일정 부분 욕심을 갖고 그들을 이끌어주는 것도 자녀 교육에서는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은 나에게 자녀 교육에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의미를 다시 짚어보게끔 했다.

어느 날 공자의 경제적 후원자이자 제자인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자장과 자하 두 사람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자장은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는 데가 있다.”
“그러면 자장이 낫다는 말씀입니까?”
자장의 반문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진 못함과 같다.”


<논어> 선진 편 중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나온 이 성어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상태’가 가장 좋으며 중용(中庸)의 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자녀교육 면에서도 얼마나 필요한 태도인가? 이 사회에서 부모의 욕심으로 자녀의 삶을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숙명여고의 그 쌍둥이 자매는 전적으로 그들이 그런 길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중용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렵다. 그 균형감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군자이고,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인간이다. 그런 사람은 드물다. 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중용 자체에 목을 매지 않는 대신 과함과 모자람 중 하나를 선택해 보라면 나는 모자람을 택하겠다. 물론 이 모자람은 자녀 성장에 욕심이 전혀 없는 무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녀의 중요한 순간에 그들의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을 무시한 채 내 욕심으로 그들을 푸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우리 아이들이 선택한 결과를 지켜보고 응원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한 자녀 교육에서의 모자람이다. 신문 기사나 교육 잡지 속 많은 부모의 사례를 보면 때로는 부모의 욕심이 지나침보다 모자란 경우 자녀가 독립적으로 자신만의 행복한 삶을 꾸려가는 것을 많이 목격하게 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유행어가 있다. 하랑이와 예람이가 커갈 때 내 욕심으로 오늘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부모로서 ‘모자람’을 지향할 때 우리 아이들이 주체적인 자유를 온전히 누리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책임지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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