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에세이. 햄릿과 나, 축구 볼래 육아 할래 둘 다 할 수 없나?
나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있다.
이렇게 시작하니 남들이 느끼기에 엄청나게 거창한 것을 놓고 선택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선택을 위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던지 내겐 좀 중요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을 놓치고 나중에 후회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피파 주관 대회로는 처음으로 U-20 월드컵 결승전을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선수들이 우크라이나 대표 선수들을 상대로 치르게 된다. 2019년 6월 16일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2시나 3시 시작보다는 나은 편인가? 2시나 3시면 요새 체력이라면 다음 날은 거의 초주검이다. 1년 전이었다면 아마 무조건 봤을 터인데, 지금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번민이 계속되는 토요일, 글을 쓰는 이 순간 햄릿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햄릿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빼앗아간 삼촌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였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화살이 꽂혀도 죽은 듯 참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니면 창칼을 들고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재앙과 싸워 물리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 셰익스피어, <햄릿> 중
진실을 묻어두고 안정과 명예, 권력이 보장된 삶을 선택할 것인가, 진실을 밝히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쪽이나 가시밭길이다. 전자라면 햄릿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의 내면은 점차 썩어 문드러져 갈 것이다. 후자라면 원작처럼 자신을 둘러싼 호의적이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이어나가게 될 것이고 결국 그의 외적 삶은 스스로 파멸하는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햄릿은 모든 것에 초연한 단수로서의 삶을, 또는 수많은 관계 속에 얽매인 다수로서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고 최종 결정은 '관계 속의 나'를 선택하였다. 죽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복수해야만 했다. 덴마크의 유력 왕위 계승자로서 정당하지 않은 절차로 숙부에게 승계되었던 왕위를 정의롭게 바로잡아야만 했다. 그 자신의 복수와 정의를 위해 그는 사랑을,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했다.(햄릿은 살아 있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긴 것 같다.)
햄릿의 문제는 그 형태가 나의 문제랑 비슷하게 닮아있다.(물론 본질은 당연히 다르다. 햄릿의 고민에 같다 붙인 것이 좀 오버스럽긴 하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결과를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음 날 살아 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니면 역사의 한 장면을 실시간으로 즐긴 후 다음 날 장렬히 죽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육아, 오로지 그것뿐이다.
셋째가 태어난 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아내가 셋째를 케어하느라 밤중에도, 새벽에도 계속 에너지를 쏟고 있는 지금, 첫째와 둘째는 내가 대체로 건사하고 있는 중이다.(물론 좌충우돌 중......) 특히 둘째가 유난히 나에게 붙는다. 첫째에 비해 엄마 의존도가 높았던 둘째가 셋째 태어나기 한 달 전부터, 그리고 태어나고서는 유독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밥, 잠, 간식, 놀기 등 무조건 나에게 와서 해달라고 하면서 내가 잘 대응하지 못하면 엄청 운다.(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다.)
둘째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모를까. 다만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아직까지 성품의 그릇이 넓지 못한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아이들은 갓 출시된 리튬 배터리라 용량도 크고 충전도 금방 된다. 나는 좀 헐어서 방전이 자주 일어난다. 예전에 사용하던 아이폰 4S의 배터리 게이지가 번개처럼 줄어드는 것처럼. 마음은 이것저것 해주고 싶은데 몸이 못 따라가니 마음과 몸의 괴리는 내 안의 자책감을 조금씩 키운다. 그것을 건강하게 해소하지 못해 그 마이너스 감정을 아이들에게 쏟아낸다. 그러면 또 미안하고. 둘째는 요새 밤마다 계속 자지러지게 우는데 미안하고 짜증 나는, 복합적인 감정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마음과 몸의 차이를 최대한 줄이고 내 그릇을 더 키우는 게 좋은 아빠가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을 통해 체력도 키우고 늦게 자지 않고 체력을 잘 보존하는 것, 그리고 아이의 감정을 내가 반사하지 않고 수용해 주는 것,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이니 결승전을 본다는 것이 나에겐 무한도전이다. 다음 날 첫째, 둘째를 잘 케어하려면 잠을 무조건 충분히 자야 한다. 아니면 주일에 랑람 남매를 잘 돌볼 수 없다. 월요일, 오랜만에 학교 복귀할 때도 컨디션이 바닥을 쳐서 수업이나 학교 학생들을 잘 챙기지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이다. 이런 중요한 시합을 생애 언제 한 번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겠는가.
글을 쓰기 전까지도 결정을 못 내렸는데 글을 쓰면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살아야겠다.
햄릿이 '관계 속의 나'를 선택한 것이 참고가 되었다. 인간 박태성으로서, 단수로서 산다면 일생일대의 결승전을 시청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박태성보다는 아빠 박태성이 우리 아이들에게, 남편 박태성이 우리 아내에게 더욱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슈퍼맨이 될 수 없다면 결국 우선순위에 따라, 지금 체력에 따라 선택을 잘해야겠지. 그래서 햄릿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해낸 것처럼 남편 박태성, 아빠 박태성으로서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아내를 잘 돕고 두 아이를 잘 케어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새벽에 축구 결승전을 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최상의 기량을 보여주고 경기도 승리하여 우승의 감격을 그들 스스로도 만끽하고 국민들에게도, 나에게도 선사할 것이라 기대한다. 우리 반 급훈처럼 대한민국 대표팀이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여 좋은 결과를 거두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