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그리움만 깊어 가는 밤, 마음을 진하게 울리는 말
“아내, 아무리 치팅 데이(Cheating Day)라도 중요한 규칙은 지켜야겠지?”
아마 아내도 알았을 것이다. 이 질문은 ‘답정너’라는 것을. 그럼에도 아내는 되묻는다.
“중요한 규칙이 뭔데?”
“아니, 뭐, 예를 들어 밤 9시를 넘어서는 간식을 먹지 않는다 같은 거? 특히 컵라면…….”
인바디가 원수다. 하지 않았으면 이런 고민도 없이 그냥 흡입했을 텐데. 사연은 이렇다. 어제 오후 아내와 나름 데이트를 하려고 외출했다. 가끔 가는 경포 인근의 보헤미안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던 중 아내는 은근 점심을 많이 먹었는지 강릉 종합운동장 근처의 공영 수영장 앞에서 운동 겸 소화를 위해 내렸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언제나 보헤미안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문안으로 커피의 그윽한 향이 나를 꼬신다. 코가 꿰여도 좋아, 한 걸음 한 걸음 주문하러 간다. 오늘의 커피는 ‘하와이안 코나’, 난 어디서나 드립은 주로 케냐 AA나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선호하지만 보헤미안에서 마시는 ‘오늘의 커피’는 특별하다. 바리스타가 당일에 추천하는 원두니 더욱 그렇다. 주문하고 두근두근 기다린다. 정갈한 붉은색의 꽃무늬 디자인이 인상적인 커피잔에 담겨 나온 화와이안 코나, 쟁반에 받혀 공손하게 들고 2층으로 간다. 한 방울도 흘릴 수 없다. 양손의 균형이 중요하다. 어느 한쪽으로 쏠려 한 방울이라도 정처 없이 흐르게 할 수 없다. 네가 흐를 곳은 오직 나의 마음뿐이다. 2층에 무사히 안착하여 하와이안 코나를 마신다. 입안에서 커피를 혀로 굴려 본다. 신맛과 쓴맛의 조화가 좋다. 커피 내음이 코를 통해 뇌로 전달될 때마다 주변의 색채가 총천연색으로 덧칠된다. 그렇게 코나와 재미나게 노는 중 아내가 왔다.
바로 카페로 직행하지 않고 먼저 수영장에 들렸다고 했다. 그곳에서 인바디 측정을 무료로 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사뭇 흥미로웠다. 아내가 자신의 인바디 분석표를 보여주는데 호기심이 동했다. 그저 난 저질 체력일 수밖에 없는 부실한 몸이겠거니, 마른 비만이겠지(보이지 않는 곳에 살이 많아요), 그렇게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 왔었다. 어디 이 기회에 한 번 제대로 측정해봐? 그리하여 카페에서 나와 아내와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 휴게실에 있는 인바디 측정기에 올라섰다. 하라는 대로 했더니 몇 분 안 걸리고 끝났다. 양말을 신는 동안, 아내가 내 분석표를 먼저 보더니 큭큭 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뭐지? 설마 하는 심정으로 확인했는데, 이런.(다음 문단까지의 행간에는 엄청난 한숨이 숨어 있습니다.)
소중한 개인 정보이므로 결과를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는 없지만, 마른 비만은 개뿔, 그냥 비만이었고 복부도 장난 아니고, 결론적으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정량화된 수치를 보니 막연하게 아직은 괜찮겠지 생각했던 나의 안일함은 이제 방을 빼야 할 때가 되었다. 결국 식습관을 조절하기로 아내와 이야기했다. 삼 남매의 아빠로서 오랫동안 그 아이들의 성장을 옆에서 함께 하려면 건강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므로, 토요일을 치팅 데이로 정하여 그날만 먹고 싶은 인스턴트 음식을 적당히 먹고 다른 날은 건강식 중심으로 먹기로 하였다. 그렇게 외출 후 헬스장에 가서 생전 잘하지 않았던 복부 운동을 엄청 해댔고, 밤에 먹어대던 과자나 라면도 먹지 않고 감자와 고구마로 그날 저녁, 약간의 허기를 달랬다. 냉장고에 있는 탄산은 다 출가시킬 예정이다. 그리고 하루 지나 치팅 데이인 토요일, 바로 오늘! 억눌렸던 욕구와 잘못된 식습관이 반란을 일으켰다. 야식으로 컵라면을 먹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속으로 침을 몇 번이나 흘렸는지 모르겠다. 결국 아내에게 은근슬쩍 동정표를 얻으려고,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남편이 그렇게 먹고 싶으면 오늘 하루만 먹어. 스트레스 너무 받으면서 식단 조절하면 오히려 폭식하고 요요 올 수도 있으니까. 컵라면 먹을 거야?”
우리 아내는 천사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다음 말에 난 두 눈을 부릅떴다. 핏발이 설 정도로.
“나 컵라면 먹었는데.”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먹으려고 갖다 놓은 농O 육개장을 벌써 아내가 먹어버렸다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지. 그건 내가 먹어야 하는 것인데? 이럴 수가. 그럼 나의 야식 계획은……. 귀찮게 다시 사 갖고 와야 하나?
좌절, 절망, 후회, 그리고 분노가 갑자기 날 몰아쳤다. 아니, 이러면 안 된다. 다시 확실하게 물어보자.
“뭐?”
“교회에서 먹었다고. 난.”
아! 할렐루야. 제 컵라면을 지켜주셨군요. 내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괜히 아내에게 미안했다.
“난 또, 아내가 육개장 먹었다고 한 줄 알았네.”
피식 웃으면서 나의 음식에 대한 예민함을 놓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참 옹졸한 사람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20대 시절에는 옹졸함이 아주 관리 잘 된 모공 같아서 –엄청 좁다는 얘기죠- 다른 사람의 사정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이런 성격이 또 간식과 결합하니 참 웃기는 상황도 많이 벌어졌다.(지금 생각하니 웃긴 것이지, 그 당시에 나는 무척 심각했고 어머니와 남동생은 아마 어이없었을 듯하다.) 나는 감자칩 스낵을 엄청 좋아한다. 특히 오리O에서 나오는 포카칩이란 과자는 그 당시 매일 하나씩 컴퓨터 하면서 먹어야 하는, 나만의 소확행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두세 개를 방의 책장에 쟁여 놓았다.
하루는 대학에서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아, 이제 집에 들어가서 포카칩이나 먹으면서 컴퓨터를 해보실까, 하나 남긴 했는데 다른 간식 안 사가도 되겠지?’ 하며 나름의 계획과 기대감을 갖고 집에 돌아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니 딱 보이는 게, 어머니와 동생이 TV를 보면서 무언가를 먹고 있는 장면이었다. 어? 뭐지, 어디서 많이 본 파란 봉지인데. 포카칩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하나 남은 내 포카칩일 리 없어. 불안한 마음에 내 방으로 들어갔다. 책장을 뒤졌고, 곧 절규했다. 눈이 조금 돌아갔다. 바로 거실로 나가 어머니와 동생에게 소리쳤다.
“왜 남의 포카칩을 허락도 없이 막 먹고 그래? 먹을 거면 다시 사놓든지 해야지!"
버럭 고함을 치고 씩씩 거리며 바로 포카칩을 사러 나왔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와 동생의 황망한 눈빛이 갑자기 아내와 대화하다가 떠오른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똑같은 짓을 할 뻔했다는 것에 참 부끄러웠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포카칩 사건 이후로는 좀 조심했던 것 같다. 미안함에 간식을 사 올 때는 어머니와 동생 몫도 챙겼다. 가정을 꾸리고 명절에 올라가면 가끔 이 일을 가지고 어머니와 동생이 나를 놀려먹기도 한다. 놀림당해도 싸지. 지울 수 없는 흑역사.
한데 그렇게 놀림을 당하는 와중에 어머니가 언젠가 한 번 했던 말이 있었다. 그때는 듣고서 마음속에 그냥 묻어 놓았는데 오늘 일로 갑자기 되살아나 계속 마음속에 맴도는 말.
“그런데, 아들, 아들이 옆에 없으니 간식 사 오는 사람도 없네.
그렇게 뺏어 먹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
오늘 육개장과 예전 포카칩 사이에서 어머니의 이 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울리는지, 헛헛하게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를 둘러싼 이 밤은 계속 깊어만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