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90년생이 온다>를 읽고 나에게 질문해 본다
新 직장인 꼰대 체크 리스트
1.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요즘 세대를 보면 참 도전정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2. 헬조선이라고 말하는 요즘 세대는 참 한심하다.
3.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은 공적인 시간이다. 싫어도 팀원들과 함께해야 한다.
4. 윗사람의 말에는 무조건 따르는 것이 회사 생활의 지혜이다.
5.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나이나 학번을 물어보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속이 편하다.
6. ‘정시 퇴근 제도(패밀리 데이)’는 좋은 복지 혜택이다.
7. 휴가를 다 쓰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8. 1년간 ‘육아휴직’을 다녀온 동료 사원이 못마땅하다.
9. 나보다 늦게 출근하는 후배 사원이 거슬린다.
10. 회식 때 후배가 수저를 알아서 세팅하지 않거나, 눈앞의 고기를 굽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난다.
11. ‘내가 왕년에’, ‘내가 너였을 때’와 같은 말을 자주 사용한다.
12. 편의점이나 매장에서 어려 보이는 직원에게는 반말을 한다.
13. 음식점이나 매장에서 ‘사장 나와’를 외친 적이 있다.
14. ‘어린 녀석이 뭘 알아?’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15. 촛불집회나 기타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학생의 본분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6.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란 말에 동의한다.
17. 낯선 방식으로 일하는 후배에게는 친히 제대로 일하는 법을 알려준다.
18.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하라고 해놓고 내가 먼저 답을 제시한다.
19. 내가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20. 회사 생활뿐만 아니라, 연애사와 자녀계획 같은 사생활의 영역도 인생 선배로서 답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21. 회식이나 야유회에 개인 약속을 이유로 빠지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22. 내 의견에 반대한 후배에게 화가 난다.
23. 자기 계발은 입사 전에 끝내고 와야 하는 것이다.
[테스트 결과]
0개 : 대단합니다. 당신은 꼰대가 아닙니다.
1~8개: 꼰대입니다. 심각하진 않지만 꼰대가 아닌 것도 아닙니다.
9~16개: 조금 심각한 꼰대입니다.
17~23개: 중증 꼰대입니다.
결과에 너무 충격을 받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결국 위 테스트는 ‘누구든 언젠가는 꼰대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꼰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누구라도 완전히 꼰대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꼰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완벽한 탈출을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단지 스스로 꼰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개선해나갈 따름이다.
<출처 : 90년생이 온다 | 임홍택 저>
아, 그렇다. 나는 꼰대였던 것이다. <90년생이 온다>를 읽는 도중 무심결에 한 이 테스트에 따르면 약 3개 정도로 나는 꼰대임이 분명하다. 중증 꼰대이거나 심각한 꼰대는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원래 꼰대는 자기 자신이 꼰대인 줄 모르는 건가? 그래서 나도 나 정도는 꼰대가 아니지, 아니겠지 하며 테스트를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 근데 지금 왜 내가 꼰대인지 아닌지에 스스로 집착하고 있는 것이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꼭 이 테스트를 해보시라.(나만 꼰대가 될 수 없으니.)
꼰대라는 자아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한 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서 체크 리스트를 자세히 살펴본다. 점심시간을 팀원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가끔 자발적 혼밥을 통해 기력을 충전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정시 퇴근이나 휴가 사용은 직장인에게는 공기로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 아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은 왜 쓰니? 그래, 이런 무례한 것이나 당연한 것, 개인의 특수성을 저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애매한 것들 3가지가 있다.(어쩌면 자기변명일 수도 있지만)
#1. 16번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란 말에 동의한다.
이 문장이야말로 케바케(Case by Case) 아닌가?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반대로 전적으로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이 지식의 총량이 늘어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이 공부한 사람이더라도 그것을 잘못된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반대로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 어르신이지만 인생의 진리를 삶의 경험 가운데 깨달은 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이 16번 항목에 동의한다고 하여 꼰대가 되어버리는 결과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2. 17번 낯선 방식으로 일하는 후배에게는 친히 제대로 일하는 법을 알려준다.
서로 간의 소통이 거세된 상태에서라면 이런 행동은 꼰대가 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 다만 그 후배의 낯선 방식이 창의적이면서 올바른 방식인지, 아니면 정말 괴상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인지에 따라 대응은 달라지겠지. 그러니 소통이 먼저다. 그런데 소통하고 나서 전자가 아니라 후자로 판명되었다면, 그다음은 어찌해야 하나? 그때도 친히 제대로 일하는 법을 알려주면 꼰대인 것인가? 나는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후배를 위해서도, 함께 속한 조직을 위해서도, 그리고 선배인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므로 방점은 사실 ‘친히 알려 주냐, 알려 주지 않느냐’가 아니라 ‘알려주기 전에 소통했는가, 안 했는가’가 아닐까? 꼰대 대접을 피하기 위해서 무조건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면 그 조직 참 잘 돌아가겠구나.
#3. 20번 회사 생활뿐만 아니라, 연애사와 자녀계획 같은 사생활의 영역도 인생 선배로서 답을 제시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야, 나 때는 이랬어.’, ‘이건 이렇게 하면 돼.’ 등 자기 경험이 모두 정답인 양 말하면 누구나 당연히 싫어하겠지. 대신 답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과 경험을 제시해 줄 수 있지는 않을까? 미리 살아본 사람으로 아직 살아보지 못한 사람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꼰대인 것일까? 개인의 사생활은 최우선적으로 존중해 줘야 하는 것이므로 그저 구체적으로 묻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원하지도 않는데 먼저 가서 막 이야기를 꺼내면 꼰대 인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먼저 손 내밀고 그의 마음을 들어보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꼰대라고 한다면 세상은 참 팍팍하기만 한 것 같다.
애매한 것들을 놓고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 딱한 것이 생겼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편을 갈라야 하는가? 냉전 시대에는 공산주의, 자유주의로 대립하다 보니 빨갱이라는 단어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남녀 간의 갈등은 페미니즘을 놓고 각자 해석하는 방향이 다르다 보니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는 양상이다. 이제 여기에 ‘꼰대’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꼰대이냐 아니냐를 놓고 서로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가 대립하고 있는 양상까지 추가되었다. 이 꼰대라는 단어가 인터넷상에서 사용되는 양태를 보면 꼰대 후보자의 언행을 심도 있게 점검한 다음 꼰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무조건 꼰대라고 지칭해 버리고 거기에 맞춰 말과 행동을 해석한다. 한 번 꼰대로 낙인이 찍히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 따스한 말, 진정성이 있는 말을 해도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 꼰대니까. 꼰대는 소통할 수 없는 꽉 막힌 존재니까. 안타까운 일이다. 내 생각과 다르면 그를 공격할 수 있는 최고의 단어가 생긴 것이다. 바야흐로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는 세상, 꼰대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서 이전보다 다원화된 사회, 개인의 개별성과 특수성이 강조되는 사회, 대서사보다는 소서사 중심의 문화가 자리 잡은 사회이다. 이렇게 다양한 생각과 삶의 방식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인데도 오히려 우리의 생각은 이분법적 사고로 단순화되어 개별적 실체와 현상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 나와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을 그냥 ‘꼰대’라고 규정해 버리면 편할 것이다. 소통은 힘들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각자의 모난 부분을 조금씩 깎아가면서 마음을 통하게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리니 얼마나 머릿속이 깔끔・명료해지겠는가?
신영복 선생님은 군자를 지향하는 사회가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위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출처 : 강의 | 신영복 저>
꼰대든, 꼰대로 규정하는 사람이든, 수많은 개성을 몰지각한 이분법으로 자기화하지 않았으면 한다. 마치 공자가 이야기한 소인처럼 어설픈 자기화는 타인을 내 입맛에 맞게 쉽게 규정하려는 지배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결과는 뻔하다.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하나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르는 군자가 되고 싶다. 고고하게 혼자 품위를 유지하며 사는 삶이 아닌, 세상 속에서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진실하게 소통하기를 놓치지 않는 삶.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진창 속에서도 진주를 발견하는 군자처럼 살고 싶다.(나 자신이 그런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바람은 간절하다.)
꼰대가 넘쳐나는 이 각박한 사회 속에서 내가 꼰대가 되는 것, 꼰대로 나도 모르게 찍히는 것, 두 가지 다 사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