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묘 Jan 18. 2020

지하철 1호선에서 너를 만나다

일상. 광화문 교보문고를 향하던 여정 속에서

그날의 너를 오늘 우연히 만났다.


몰랐다. 여전히 너가 그곳에 머물러 있는 줄은. 나에게는 놀라움이었다. 잊힌 기억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던 너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오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하철 대합실의 혼잡함을 뚫고 열차 속 긴 좌석, 그 가장자리에 몸을 구겨 넣었다.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들킬까 봐 숨소리만 내며 잠자코 있던 나를, 너가 불렀다. 마치 서울에 갓 상경한 촌놈처럼 너무나 많은 사람에 치여 지쳐있던 나였다. 누가 버리고 간 검은색 쓰레기 봉지처럼 열차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을 뿐이다. 그저 눈만 움직여 어제까지의 강릉과는 다른,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서울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을 뿐이다.


너는 나에게 지나간 추억이었을 뿐이다. 너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다짐한 적도 없었다. 물 흘러가듯이 그렇게 흘려보내 대학 시절, 무성하게 푸른 잎사귀만 피우고 꽃은 피우지 못했던 시절의 천둥과 바람과 비와 눈을 그저 잊고 싶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 속에서 처연하게 삶을 이어갔던 너를 잊고 싶었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종각을 향하는 지하철 1호선의 열차 속에서, 언제일지도 모르는 아득한 시간까지 너는 나를 잊지 않고 기다려왔던 것일까. 그 마음으로 오늘 이 시간에 나를 나지막하게 부른 것일까.


이제 너의 모습이 조금씩 떠오른다. 새벽녘까지 이어진 과제로 너는 밤을 잊었다. 출근 시간, 분주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농구장에서나 볼 법한 검은색 대형 점퍼를 입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열차를 탔다. 바로 이 지하철 1호선 열차의 가장 마지막 칸에, 더 이상 다음 칸으로 이동할 수 없는 마지막 벽에 너는 매미처럼 붙어 있었다. 잠은 너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잠의 세상에 가있는 동안 현실 속에서 너의 무릎은 몇 번이나 꺾였다. 사람들의 벽이 강제로 너를 쓰러지지 않게 해 주었지만 너 앞에 서 있었던 사람은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날 과제는 무사히 제출했었다. 하지만 너는 성실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미리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벼락치기로 늘 과제와 시험을 준비했던 자신의 나태함을 너는 혐오했었다. 대학 생활이 충만하지 못한 이유를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던 너는 방황했었다. 과제만 제출하고 다른 사람이랑 어울리지 못한 채 바로 집으로 향했던 너의 뒷모습은 힘겨워 보였다.


너가 나에게 묻는다. 행복하냐고.

대답해 주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너 역시 나의 행복이었어.

너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행복하구나.


그거면 됐어.


열차가 다시 덜컹거리며 다음 역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다시 시간이 흐르는 열차 속에서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조용히 서로 바라본다. 중간에 들어오는 많은 사람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만 너와 나의 응시는 단절될 수 없다. 느낄 수 있다. 아련한 젊은 날의 추억으로 그때의 너가 여전히 저 벽에 서있다. 다시는 만나서 악수할 수 없는 너를 그동안 외면해 온 나를 용서해 다오. 미안함에 너에게 고개를 숙인다. 너는 그저 담담하게 웃어줄 뿐이다. 회색빛이었던 너가 이제는 천연색으로 나에게 웃어줄 뿐이었다.





후기


#1

오랜만에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다녀왔습니다. 올해 수업에 사용할 교재를 찾아보려고 올라갔었지요.(우리 학교는 미안가 학교라서 검인정 교과서를 사용할 필요가 없거든요.) 서울은 올라올 때마다 새삼스럽습니다. 사람도 많고, 차도 그렇고, 모든 것이 너무나 분주해요. 강릉에 정착하여 산지는 이제 6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제 삶은 강원도에 최적화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못 살 것 같아요. 올라올 때마다 한적한 지방 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만 커져 갑니다.


#2

KTX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하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지하철역 내부에서는 꽤 헤맸어요. 계단 내려갔다가 플랫폼 확인하고 다시 올라가서 다른 쪽으로 내려가고, 출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스마트폰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지도 어플로 위치를 확인하고.(제가 이렇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랜만에 1호선을 탔지요. 무심결에 자리에 앉았는데 발밑 바닥에 핑크색이 어른거렸습니다. 이게 뭔가 싶어 봤는데 임산부 전용 자리라네요. 상식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후다닥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곧 주위를 둘러보다가 칠이 벗겨진 벽을 발견했습니다. 그제야 제가 마지막 칸에 탔다는 것을 또한 깨달았습니다. 저도 언젠가 저 벽에 붙어 칠을 벗기는 것에 일조한 추억이 떠올랐지요.

  저만 그랬겠어요? 삶이 거칠어도 기어이 버텨낸 풀뿌리와 같은 존재들이 저 벽에 저렇게 치열한 흔적들을 남겨 놓았겠지요. 그래요,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 말이에요. 아마 당신의 치열함도 오늘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놓았겠지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인생이 치열하게 벽에 부딪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하철 1호선 마지막 칸, 그래, 너도 그곳에 있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의 너를
매거진의 이전글 꼰대는 사양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