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모든 면에서 평균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1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거짓말 중 하나는, “대학 가면 여자 친구는 저절로 생겨. 그러니까 딴생각하지 말고 공부해!”였다. 아, 여자 친구는 저절로 생기는 거구나. 공부만 열심히 하면, 그래서 대학만 가면 만날 수 있겠지. 그래, 지금은 좀 참아보자. 나는 그렇게 고백 한 번 못해보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큰일이었다, 대학에 갔는데 여자 친구가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과가 여초라서 쉽게 사귈 수 있겠거니 했는데, 여자 동기들은 남자 친구를 다 밖에서 찾아왔다.(이래서 설레발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귀고 싶지만 사귈 수 없었던 불쌍한 청년은 전전긍긍하며 대학에서의 첫 일 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날 위로한답시고 이런 얘기를 해줬다.
남자가 결혼하기 전까지 보통 네 번 정도는 연애를 한다고 하니까,
너도 희망이 있어. 이제 네 번이나 남았다. 아직 시간은 많아!
누군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때는 위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다른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단순하게 생각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처음엔 아, 그래, 그럼 네 명 정도는 만날 수 있겠구나. 나도 연애할 수 있어!라고 장밋빛 희망을 가졌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만난 친구에게 이 고급 정보를 전해줬다.
나 : 야, 너 남자가 결혼하기 전까지 보통 몇 번 연애하는 줄 아냐?
친구 : 아니.
나 : 네 번 정도 한다 그러더라. 그러니까 나도 대학교 졸업하기 전까지는 최소 한 번은 연애해볼 수 있지 않겠냐? 흐흐.
친구 : (이런 병신이 있나 하는 표정으로) 야. 너 그게 진짜 의미하는 게 뭔지 알아?
나 : (너 왜 그러냐, 왜 그런 표정이야) ……, 내가 네 번 연애할 수 있다는 거?
친구 : 잘 들어, 인마. 그건 어떤 놈, 그래 원빈같이 생긴 놈이 예쁜 여자랑 여덟 번 사귈 때 너 같은 놈은 한 번도 못 사귀고 손가락 빨면서 구경이나 한다는 거야.(비속어 작렬)
나 : ??!!!!!!!!!!!!!!!!!!!
그 친구는 참 좋은 친구였다. 평균의 교활함에 속아 넘어갈 뻔한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준 인생 스승이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연애 한 번 못 한 채로 그렇게 대학 생활은 끝이 났다. 그 녀석의 해석은 나를 향한 일종의 예언은 아니었을까......(안경을 벗고 눈물 닦는다.)
#2
1960~1970년대에 진행된 스탠퍼드 대학교의 심리학자 월터 미셸의 마시멜로 실험은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아마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이 실험 이름은 들어봤을 것 같다.) 이 연구의 골자는 이렇다. 취학 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마시멜로를 10분 동안 바로 먹지 않고 인내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10년 뒤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몸매도 더 날씬하고 사회 적응도 더 잘하고 SAT에서는 210점이나 더 많은 점수를 받았다. 이런 관찰 결과를 토대로 성공한 사람들은 인내심이라는 특성을 전제로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고, 그래서 너 나 할 것 없이 인내라는 미덕을 아무렇게나, 아무 상황에나 갖다 붙이는 모습도 발견된다.
이 실험의 통계적 결론이 너무나 정론이었기에 –교육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쉽게도 실험 과정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예컨대 1980년대에 진행된 2차 실험의 참가자가 1차 실험의 653명 중에서 185명이었고, SAT 성적을 제출한 사람은 그의 절반밖에 안 되는 94명이라는 것이나 2011년에 발표된 3차 연구는 94명보다도 적은 인원으로 뇌 활성 차이를 입증했다는 것, 그리고 미셀의 실험을 뒤집는 또 다른 실험의 결과와 같은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2013년 로체스터 대학교의 홀리 팔메리와 리처드 에슬린은 1월 《코그니션(Cognition)》에 발표한 「합리적 간식 먹기(Rational Snacking)」라는 논문에서 상식화되어있던 마시멜로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첫 번째 마시멜로를 빨리 먹은 아이들 중 일부는 참을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돌아오면 하나를 더 주겠다’는 연구원의 말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일수록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좀 더 오래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생각해 보자. 불안정하고 가난한 가정에서는 오늘 먹을 것이 있어도 내일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부모의 벌이가 변변찮기 때문에 당장 먹는 것에서부터 그 여파가 나타난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당장 먹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을 자연적으로 습득하게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먹으려고 놔뒀다가 없어지면 내 손해니까.(형제, 자매, 남개 간의 치열한 다툼은 우리 집에서도 가끔 나타난다.) 또한 부모가 나중에 좋은 것을 약속하더라도 가정 형편 때문에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를 겪으면서 미래를 계획성 있게 살기보다는 당장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욕구를 충족하며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 반대로 안정적이고 풍족한 가정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먹고사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니 당장의 욕구 충족이 최우선 순위가 되지는 않는다. 부모는 정교한 계획 하에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아이는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부모와 약속한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의 센딜 뮬리네이선 교수가 2013년 펴낸 책 <희소성: 지나친 부족이 의미하는 것>에도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단기적인 보상에 집착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를 마시멜로 실험에 적용해보면, 두 번째 마시멜로가 약속한 대로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눈앞에 있는 마시멜로를 고민할 것 없이 먹어치우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먹는 것뿐만이 아닌, 학습, 인간관계, 직업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뉴욕대학교의 타일러 와츠, UC 어바인의 그레그 던컨, 호아난 쿠엔이 2018년 6월 초 <심리 과학>에 발표한 연구에서도 마시멜로에 당장 손을 뻗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아이의 의지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긴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 10년, 20년 뒤 인생의 성공을 예견하는 결정적인 징표라도 되는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연구를 진행한 타일러 와츠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의 배경과 가정환경 등을 고려해 실험 결과를 다시 해석하면 어렸을 때 당장의 유혹을 참아내고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 훗날 인생의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식이 참을성과 의지가 부족하다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1차에서 3차 실험까지 진행되는 중 185명을 제외한 468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185명 중 91명은 왜 SAT 점수를 제출하지 않았을까? 또한 기존의 마시멜로 실험의 결론을 뒤집는 여러 후속 실험이 존재한다는 것은 마시멜로 실험에서 어떤 것을 시사하는 것일까?
앞의 두 가지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통계이다. 통계란 ‘어떤 현상을 종합적으로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일정한 체계에 따라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를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두 가지 함정에 걸려들 수 있다.
하나는 불편한 진실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간파하지 못하면 잘못된 해석이 자기 자신을 옭아맬 수 있다. 특히 내가 통계 수치의 범위 중 바닥에 속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나의 대학 생활이 그랬다. 친구의 현명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자들의 결혼 전 연애 횟수 4번’이라는 숫자를 내 관념 속의 사회적 기준이자 상식으로 점차 신경 쓰게 되었다. 적어도 한 번은 사귀고 졸업해야 하는데 하는 막연한 통계적 해석이 나를 뒤따라 다녔고, 그럼에도 진전이 없었던 연애 사업은 나란 놈이 남자로서는 전혀 매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런 비뚤어진 인식이 고착화되어 갔던 대학 생활 내내 나는 고통스럽고, 외로웠으며, 열등감에 빠졌었다. 그때는 자존감도 약했던 시절이라 그런 비이성적인 심리 상태에서 정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자기 선택 편향’이란 것이 있다. 자기 자신이 임의로 추출된 실험 대상들, 즉 쉽게 이야기하면 통계가 보여주려고 하는 집단 중 일부라면 자신을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여기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는 인지적 경향성을 말한다. 실로 자신에게 있어 최악의 결과는 무심결에 피하고 싶어 하는 심리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로또를 사면서 자신이 1등이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거나 주변 지인들이 암에 걸려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암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 자기 선택 편향과 연결되는 인지 오류이다. 통계를 생각 없이 들여다보면 이런 편향에 빠지기 쉽다.
다른 하나는 고유성, 개별성이 거세되어 있다는 것이다. 통계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특성을 단순화하여 긍정적인 부분이나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부각한다. 마시멜로 실험의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도 보여준 사람들보다 보여주지 않은, 숨어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아까도 질문한 것이지만 왜 91명은 SAT 점수를 내지 않았을까? 자료로 제출하기에 점수가 자랑스럽지 않아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에 사용되는 공식적인 자료라면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제출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제출하는 것이 부담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마시멜로 실험의 성과는 부정확한 통계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에 다소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그 밖에도 2차 실험에 응하지 않은 468명 모두 몸매도 날씬하고 사회 적응도 잘하며 SAT 점수도 그렇게 210점이나 상승했을까? 측정할 수 없지만 아닐 것 같다. 당장 실험에 응한 185명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누구나 똑같이 210점이 오른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300, 400점이 올랐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100, 50점, 아니면 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개별적으로 보면 굉장히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특성을 가진 것처럼 집단화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종의 사회적 기준이자 압력처럼 작용할 수 있다. 내 추측이지만 마시멜로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 중 저 연구 결과에 합치되지 않은 사람들은 속으로 ‘나도 똑같이 참았는데 왜 SAT가 똑같이 오르지 않았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마시멜로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야, 실험에 참여해서 잘 참은 애들은 몸매도 좋고 사회생활도 잘한다는데, 넌 왜 그러냐?"라는 식으로 말을 건넬 수도 있을 것 같다.(다 가정한 상황이지만) 어쩌면 실험에서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사람이 제출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충실하게 생활하고 있을 수도 있다. 결론에서 내놓은 긍정적 변화 집단에 속하는 누군가가 그렇지 않은 누군가보다 의외로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통계를 맹신하게 되면 결국 그것이 외면한 수많은 개성들은 사라진다. 사회는 획일화되고 경직화, 규격화될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노인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중략)
‘내가 이렇게 하면 우리 부모는 반드시 이럴 것’이라는 생각.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변하는 상황과 현실에 따라 부모도 함께 움직이는 능동적 존재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부모도 상수(常數)는 아니다.
(중략)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적응하는 독립적이고 개별적 존재다. 그 사실을 믿으면 함께 울며 고통을 나누면서도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과 근원이 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들이 지닌 경계를 인식해야만 모두가 각각 위엄 있는 개별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출처 : 당신이 옳다 | 정혜신 저
모든 면에서 평균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혜신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의식이 통계의 함정에서 우리를 구할 것이다. 결혼 전 연애 횟수 평균 4회를 채우지 않아도 내가 지금 결혼해서 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내 소득이 가구 소득 구간의 중위권 기준인 월 소득 350만 원에 미치지 못해도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씀씀이야 필요에 맞게 하면 된다. 대한민국 또래보다 머리카락 숱이 부족해도 그것이 남자의 전부가 아님을 확신하기로 했다. 다른 것으로 그 이상 행복할 수 있으니까. 이 세상 최고의 여자인 사랑하는 아내와 나에게 착 안기는 귀여운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다. 열심히 일할 곳이 있고, 그곳에서 정을 나누는 제자와 동료들이 있다. 평생 우정을 쌓아가는 친구들도 있다. 부족한 글이라도 실을 수 있는 문예지와 인터넷 플랫폼도 있다.
여러 평균과 거리가 먼 나의 삶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