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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Jan 27. 2020

다정(多情)도 병(病) 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일상. 설 연휴 마지막 날, 달에 누군가 떠올라 정에 취하는 밤

#1

사장님 : “저, 아버님, 아이가 똥을 싼 것 같은데요.”
나 : (화들짝) “네?”
       (서둘러서 바지 뒤쪽 끝을 열어 본다.) 스멜 굿. 당첨.


둘째(4살 남)는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어김없이 키즈 카페에서 나에게 당혹감을 선물했다. 바지에 오줌을 쌌던 과거의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 이번에는 기저귀 채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만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혹시나 별 일 없겠지 하는 마음에 여분의 기저귀를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똥 싼 거야 기저귀 벗기고 화장실 가서 깨끗이 닦으면 되는데, 다시 채울 기저귀가 없으니 그 이후부터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들어온 지 20분밖에 안 되는 이른 시간, 바로 집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까웠다.(에너지 넘치는 첫째가 정말 잘 놀고 있었단 말이지) 결국 최대한 버텨보기로 했으니 혹여 둘째가 실수할 까 봐 눈을 뗄 수가 없었다.(둘째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렇게 매의 눈으로 살핀 것은 처음이었다.) 거의 5분에 1번꼴로 둘째에게 가서, “람아, 쉬 마려워? 쉬 마려우면 그냥 싸지 말고 아빠한테 얘기해~.”를 반복했다. 둘째가 갈수록 나를 얼마나 귀찮아했는지, 나중에는 내가 다가서면 은근슬쩍 피하거나, 내가 말을 걸면 소리 지를 정도였다.(미안하다, 아들아.) 덕분에 나도 편하게 책 읽으면서 한두 시간 쉬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누구 탓이겠는가, 자업자득이지. 이 글을 쓰는 지금, 그때 생각에 한숨 쉬는 아빠 옆으로 둘째가 찰싹 붙어 귤 조각을 하나 내민다. 그래, 아들, 귤 하나에 미소 하나 교환이다. 하하.


#2

어머니 : “아들, 물 한 번 빼지?”
나 : “네.” (아무 생각 없이 음식물 여과 통을 꺼낸다)
어머니 : “아차차, 아들, 잠깐, 아, 안 돼!”
나 : “????!!!!!!”


설 연휴 중 금요일 저녁, 가족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에 자원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생색을 한 번 낸 뒤, 그릇들을 차곡차곡 모았다. 싱크대가 작아서 집에서처럼 설거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릇을 바로 수세미로 닦고 물로 헹궈 그릇을 치워버리는 방식으로 설거지해나갔다. 마치 기계처럼 정밀하게 손을 썼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입력된 프로토콜의 명령을 수행하는 설거지 머신, 그 자체였다. 음식물이 담긴 그릇도 다른 것과 같이 그릇 채 싱크대에 넣어 버렸다.(음식물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명령에 들어있지 않았다...... 고 변명해 본다.) 그 음식물이 하나둘 쌓이니 물은 점차 차올랐고, 물이 빠지지 않기 시작하니 어머니는 그저 물을 좀 빼보라고 권했을 뿐이고, 나는 설거지 머신으로서 그 명령을 받들었을 뿐인데,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월요일 저녁, 지금도 싱크대 배수구는 막혀있다고 한다. 인근 가게에서 뚫어 뻥 액체를 3통을 사서 들이부었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토요일부터 지금까지 설거지를 따로 화장실에 들어가셔서 하신다. 가족의 정을 나누는 설 명절, 둘째가 나에게 키즈 카페에서 당혹감을 안겨준 것처럼 내가 어머니에게 당혹감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불효자는 웁니다. 어머니, 죄송해요.) 지금쯤 우리 어머니는 꽉 막힌 싱크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 불편함을 선사한 아들의 생각 없음에 혀를 차실까, 아니면 설거지하고 있던 아들의 뒷모습을 아련히 떠올리실까. 왠지 둘 다 일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켈리그래피 작품. 보고 있으면 그저 아련해진다.


#3

나 : (기대 기대) “아내, 오늘 밤에 사우디랑 축구하는데 치킨이나 시켜 먹자.”
장인 어르신 : “그거 먹지 마라, 닭이나 돼지고기는 백해무익百害無益이다. 너 건강 관리도 해야 하는데 밤에 그런 거 먹는 거 아니다.”
나 : (급 시무룩) “네…….”


장인 어르신 집에 와있으니, 어른 말씀에 순종해야지. 치킨이야 다음에도 먹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자신을 달래 본다. 하지만 이번 한국과 사우디 U-23 최종예선 결승전을 시청하면서 치킨 먹고 싶었는데. 오랜만에 황금 시간대에 축구 보면서 치킨 먹고 싶었는데……. 얼마 전 아버지가 쓰러지신 적이 있는데 결국 식습관이 도마 위로 올랐다. 가족력이 의심되기 때문에 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내 식습관도 건강식 하고는 거리가 멀다. 종종 사람들에게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내 장례식 때 다들 감자튀김 한 봉씩 사 가지고 와서 관 위에 부어달라는 것이니 충분히 짐작 가능하지 않은가.(감자튀김 킹왕짱)


의기소침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에게 장인 어르신이 지나가는 투로 “고구마 삶아 주랴?” 하시기에, 얼떨결에, 네, 해버렸다. 고구마로 치킨을 갈음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고 소심하게 속으로 외친 후 겉으로는 다소곳하게 감사를 표했다. 다시 축구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장인 어르신이 고구마 다 되었으니 식으면 먹으라고 하시고 곧장 당신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팔뚝과 비교 사진을 못 찍은 것이 아쉽다. 장인 어르신, 사랑합니다.

시간이 지나 뱃속이 출출해 고구마를 찾았다. 고구마를 삶은 냄비가 뚜껑이 덮인 채 작은 다과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제 이 뚜껑을 열면 내 손가락 크기만 한 고구마 여러 개가 나를 반길 것이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뚜껑을 열었는데, 우리 장인 어르신의 사위 사랑은 상상 초월이었다. 팔뚝만 한 고구마가 막 찜질을 마친 모습으로 은근한 열기를 품은 채 요염하게 누워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감격의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을 오른손으로 간신히 틀어막았다.(동공 지진) 그리고 아내와 장모님에게 자랑한 후, 장인 어르신의 사랑을 마구 먹었다.(엄지 척) 장인 어르신이 치킨을 못 먹게 한 이유를 왜 모르겠는가.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 인제
일지 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 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배꽃에 달은 환히 비치고 은하수는 돌아서 자정을 알리는 때에.
한 가지에 어린 봄날의 마음을 두견새가 알 까마는
정이 많은 것도 병인 양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 이조년, <다정가(多情歌)>


약 800년 전 이조년이 사랑하는 사람(실제 연인이든, 임금이든 간에)에 대한 다정(多情)으로 밤을 지새운 것처럼 나 역시 설 연휴를 마감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느꼈던 다정(多情)에 취해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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