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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Jan 29. 2020

설국, 태백산 기슭에서
눈을 쏘아 올리다

일상. 차가운 눈을 만지다 문득 떠오른 오빠닭의 그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기차를 타지는 않았다. 밤도 아니었다. 그러나 산맥을 따라 굽이치는 긴 도로를 빠져나오자 또 하나의 눈의 고장이었다. 그의 시야마저 하얗게 물들었다. 주차장에 카니발이 멈춰 섰다.




눈이 올까, 비가 올까, 하긴 뭐가 되었든 오긴 올 것이다. 기상 정보를 반쯤 신뢰하던 그는 그런 마음으로 새벽부터 일어나 산에 올라갈 채비를 단단히 했다. 오랜만에 등산화와 등산 가방을 찾았다. 그것들 위로 자욱하게 내려앉은 시간을 털었다. 스틱은 필요할까? 곰곰이 생각해 본 그는 고개를 저었다. 태백산은 그다지 험한 산이 아니었다. 스틱 없이 완주한 경험도 있으니 이번에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생돈 쓰지 않으려면 이번에는 미리 준비물을 잘 챙겨야 한다. 잊지 않고 그는 아이젠을 챙겼다. 오랫동안 찾지 않은 주인에게 서운했는지 녀석은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비록 산 초입에서 파는 싸구려지만 돈으로만 가치가 결정된다면 그 또한 이 세상에서는 싸구려 취급을 받게 되리라. 그는 쓴웃음을 한 채 부드럽게 토라진 녀석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등산하기에 좋은 옷을 입고 준비물을 다 챙긴 그는 아내의 따스한 전송을 받고 길을 나섰다.


카니발에 남자 8명이 탔다. 장정 8명이 들어가니 서로 여유롭게 움직일 틈이 없을 만큼 단란했다. 등산 가방들은 차 안에서 서로 회포를 풀었다. 그들의 차는 시간과 공간을 격하여 어느새 태백산 초입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그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은 다른 나라라는 것을. 온통 하얀 세상에서는 땅과 하늘의 경계를 찾을 수 없었다. 나무는 모두 하얀 구름처럼 하늘에 걸려 있었다. 흙빛을 찾아볼 수 없는 땅은 새하얀 이불을 덮었다. 이불의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는 직접 덮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뭐가 되었든 오긴 올 것이다, 그렇게 예상했었지.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굉장하잖아. 새벽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자연의 풍광은 그를 아무 거리낌 없었던 순수의 시절로 데려다 놓았다. 오른발을 옮겼다. 뽀드득, 눈과 그의 발걸음이 함께 만들어내는 소리가 실로 경쾌하다. 뽀드득뽀드득 적막한 설국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도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살포시 젖어들었다. 


눈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는 따뜻해 보이는 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느낌은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조그만 덩어리의 눈은 무리에서 자신만 떼어낸 그를 원망하듯 서늘한 기운을 뿜어낸다. 그래, 그녀도 그랬었지. 문득 사 년을 연인으로 함께 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도 오늘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그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분주하게 서울, 경기도의 구석구석을 누빌 때, 그와 그녀는 오랜만에 만났다.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몹시도 차가운 세파에 지쳐 그는 그녀의 온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오븐에 노릇하게 구워 나온 치킨을 사이에 두고 그와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치킨의 열기가 그들 사이로 모락모락 올라왔다. 뜨거운 치킨을 호호 불면서 그저 정답게 나눠 먹고 싶었다. 그녀는 치킨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그를 추궁해 나갔다. 시작할 때는 뭉툭했던 어조가 막바지에는 시퍼렇게 날이 섰다. 아니, 아마도 그녀는 이 만남 이전에 먼저 마음속에 날을 세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냉담함에 그는 당황했다. 그녀의 언어가 차디찬 비수가 되어 마음을 찔러댔다. 아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덧 치킨의 열기는 식어버렸다. 뜨거운 심장을 갖고 있던 닭이 그저 얼음 조각처럼 덩그러니 상 위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는 속으로 치킨이나 자신이나 매한가지구나 라고 생각했다. 너나 나나 발가벗겨진 채로 외롭게 이 자리에 박제당해 버렸구나. 그럼에도 그는 지금 이 자리의 끝을 낼 의무가 있었기에 자리를 꿋꿋이 지키기로 했다. 그녀는 연신 피식거리는 웃음과 누구 보라는 듯 큰 한숨을 동시에 교차해 가며 본인이 원했던 결론으로 끌고 갔다. 최종적으로 그녀가 원했던 것을 끝내 그가 들어주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삶의 방식과 지향하는 가치가 달랐던 그와 그녀는 서로가 줄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원망했다. 그의 잘못이자 그녀의 잘못이었다. 또는 그나 그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결국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스치듯 만나고 헤어졌던 인연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의미 부여는 그에게 필요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없었던 것에 원망이라도 품었던 거야? 그는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불시에 떠오른 과거가 그를 완전히 잡아채기 전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 위에 있던 눈을 뭉쳐 하늘로 세게 던졌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또 다른 눈덩이를 집어 조물대기 시작했다. 찰흙처럼 잘도 뭉치는 눈이다. 냉기가 손을 얼리기 전에 하얀 심장을 하나 만들었다. 급하게 만드느라 볼 품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이 추레한 심장이라도 가슴 설레게 뛰게 하는 사람 덕분에 그가 지금 행복할 수 있음을. 냉혹함 속에서도 온기를 느끼는 오늘을 살 수 있음을 말이다.   


아까 던진 눈덩이가 우주 끝까지 날아가 블랙홀과 마주 했으면 좋겠다.





<후기>


#1

그날 경험 중 인상적인 것을 가끔 픽션으로 씁니다.(보통은 일반적인 수필 형식으로 씁니다만.) 그러니 에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 정확하게는 엽편 소설 내지는 초단편 소설이라고 봐야겠지만……, 업로드 편의상 일상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로 통칭하고자 합니다. 또한 픽션으로 쓴 경우에는 허구가 많이 가미되는 부분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2

어제 태백산 등반을 다녀왔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정상적인 등산로로 태백산 정상을 찍고 오지는 못 했다는 것입니다. 대설주의보와 함께 현지에서는 눈도 계속 내려 결국 등산로가 통제되었습니다. 아쉬운 대로 등산로 옆에 인가가 듬성듬성 있는 샛길로 약 1km 정도 걸었습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눈이 엄청 쌓여 있었습니다. 한 번 내딛으면 무릎까지 쑥 들어가는 곳도 있었지요. 은근 힘에 부쳤습니다만 오랜만에 보는 눈 풍경이라 즐거웠고 마냥 좋았답니다. 요즘 강릉에서도 눈 보기가 어렵거든요.

조잡하게 만든 하얀 하트와 수묵화로 그린 것 같은 나무 속 하늘. 눈의 고장에서만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입니다.
눈길을 밟으면 나는 뽀드득 소리에 내가 설국에 와있음을 새삼 느낀다.


#3 

점심은 태성 실비 식당에서 한우 갈빗살과 한우 육회를 만끽했습니다. 이 집은 연탄불에 구워 먹는 고기 맛도 최상이지만 특히 밥 먹을 때 나오는 시래기 된장국이 일품입니다. 태백산 근교에서 식사할 일 있으시면 한 번 가보시길 권합니다.(가게한테 돈 받은 것 일절 없는 깨끗한 추천입니다. 하하하.)

한우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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