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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Feb 18. 2020

단장 겸 선수인 우리에 대한 찬가

드라마. 나의 인생 드라마, <스토브 리그>를 보내며

1. <스토브 리그>를 만나다


<스토브 리그>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 덕분이었다. 토요일 저녁 속초에서 있는 친척 모임에 참석하려고 금요일 저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9시 30분쯤 됐을 때 어머니가 꼭 봐야 할 드라마가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TV 앞에 앉아 함께 그 드라마를 봤다. 냉철해 보이는 모습에 무심한 듯 툭툭 던지면서도 핵심을 명료하게 짚어내는 말투가 인상적인 한 남자가 자신의 차를 박살 내려고 했던 야구 선수와 대립하고 있었다. 단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격적인 정책을 밀어붙이는 모양이었고, 주위의 반대가 극심했다. 구단의 프랜차이즈 선수고, 실력도 준수하며, 홍보 관련 매출 실적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단장이 추진한 간판선수의 트레이드 건은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기대 없이 보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전개가 빠르면서도 갈등 구조가 허술하지 않고 워낙 주인공 캐릭터가 독특해서, 어, 좀 재밌네 하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속초로 출발하신 토요일, 그 드라마를 보던 애청자도 없는데 내가 먼저 밤 10시에 리모컨을 잡았다. 시청률 약 4%로 출발하여 종영 시 22.1%까지 올라간 그 드라마, 바로 <스토브 리그>이다. 요즘 시청률 20% 면 거의 이십여 년 전의 50%와 비슷하다고 하니, 공중파 드라마로서는 최근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셈이다. 하긴 나도 고등학생 때 열성적으로 시청했던 <허준> 이후 이 정도로 본방 사수한 드라마는 오랜만이니, 통계로도 내 개인사로도 충분히 <스토브 리그>는 기념할 만하다.


“스포츠 드라마는 흥행이 힘들다"라는 편견을 깨며 드라마의 영역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스토브 리그>는 특히 뻔한 러브 라인이나 지나친 막장 가족 관계, 어수선한 전개가 없어 좋았다. 이세영 팀장과 백승수 단장, 또는 한재희 팀원과 이세영 팀장 간의 미묘한 기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불합리함에 저항하는 진한 동료애에 초점을 맞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신인임에도 치밀한 각본으로 매력적인 극을 만들어낸 이신화 작가가 세이버 매트릭스(통계학적 분석론)를 바탕으로 풀어낸 구단 운영진과 선수단의 야구 이야기는 나 같이 야구에 조금도 관심 없는 사람조차 TV 앞에 앉혀 놓을 정도로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가 나에게 얼마나 매혹적이었는지 털어놓기 위해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KBL이든, 한국시리즈든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실제 야구를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야구팬에게는 어쩌면 유감스러운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두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 주동 인물인 백승수 단장, 그리고 대척점에 서 있던 권경민 사장. 강렬한 두 인물 때문에 극이 살았다. 답답하고 조마조마하면서도 때로는 사이다 같은 심정으로, 격정적이면서도 애잔한 그들을 지켜보았다. 백승수와 권경민의 갈등은 극의 흐름을 물살처럼 이끌었고 나는 그 격랑에 휩쓸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들과 하나 되어 함께 떠내려가다가 물살이 조금은 잔잔해졌을 때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물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드라마가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낀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각 인물의 고유한 캐릭터를 제대로 잡아서 표현한 연기자 남궁민, 오정세, 두 분에게 감사하면서도 불평하고 싶다. 하마터면 빠져 죽을 뻔했다.)

드라라에서 가장 꿀케미였던 백승수 단장(좌), 권경민 사장(우)



2. 백승수


닮고 싶다. 정말 닮고 싶은 인물이다. 나는 당황하거나 열 받으면 말을 버벅댄다. 잠들기 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는 나의 말, 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떠올리며 그때 왜 촌철살인을 못했는지 분한 마음에 잠 못 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빛 되신 강승수 단장님

백승수는 나랑 많이 달랐다. 고강선 사장과 긴밀한 협의 없이 시구 리스트를 수정하라고 지시 내린 백승수에게 고강선이 분노하며 찾아왔다. 이때 백승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응대하며 고강선에게 차를 건넸다. 그리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담담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백승수가 보여준 내면의 침착함과 강인함에 매료되었다. 나 같았으면 얼굴만 빨개진 채 상대방의 감정에 당황하여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아니, 사실 사장이 작성한 시구 리스트를 내 선에서 조정하는 것부터 무리였을지도……)


또한 그는 휴머니스트와는 일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휴머니스트임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어떤 일이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진행하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 가혹하게 상대방을 몰아붙이려고만 하는 독선적인 이기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드림즈 감독과 관련한 에피소드에서도 사안은 사안대로 냉정히 처리하지만 감독에게는 끝까지 기회를 준다. 본사의 폭력적인 감사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부하직원을 위해 각을 세우던 권경민 사장에게 허리를 숙인다. 마지막 회에서 PF 소프트의 대표를 설득하는 PT는 더욱 그렇다. 대표가 언급하고 싶지 않은 사연까지도 이용해 그를 설득하는 것을 보면 성과 주의자인 것은 분명하다.(대표도 백승수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나, 어쩔 수 없는 성과 주의자라고.)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가슴 따스하게 하는 친구들과의 추억을 애써 외면하면서 출발점을 망각해버린 PF 대표였다. 이제훈이 연기하던 PF 대표의 모습 속에는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달려온 사람만의 허무함이 은연중에 배어 나왔다. 백승수의 PT는 오히려 막연한 성장을 위해 앞만 보고 질주하던 그를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게 하여 놓고 온 것은 없는지, 그렇게 천천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니 그를 성과 주의자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얼어붙어 있던 PF 대표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뜨거운 열로 충격을 준 것은, 성과를 위해 그를 마냥 괴롭힌 것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서 다시 훈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를 봐도 백승수는 부인할 수 없는 휴머니스트이다.(방법은 과격하지만) 이런 백승수 주변에서 눈에 밟히는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극 중 불협화음으로 멋진 앙상블을 이룬 권경민이다.


2. 권경민

갈수록 애잔해지는 권경민 사장님

극 초반, 보기 싫은 악역 중 주축이겠구나 싶었다. 구단 운영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면서 그 실익을 자신이 누리려고 하는 전개인 줄 알았는데 영 아니었다.(대놓고 훼방질을 하는 빌런으로 성장할 줄이야.) 극 중반, 악역이지만 사연을 짐작할 수 있는 떡밥이 여기저기 뿌려지고 있었다. 아, 사연 있는 악당 콘셉트인가. 드라마가 너무 대놓고 모든 인물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하네, 이런 생각도 조금 들어서 실망스러웠다. 그럼에도 그가 처음보다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애잔하고 가련한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으니, 내가 제작진의 의도에 말려들어간 것이겠지. 극 후반, 권경민이 남 같지 않았다. 회장이었던 큰아버지 옆에서 일을 거들다가 모종의 이유로 좌천당한 작은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인 권경민.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 자신의 아버지를 쳐낸 큰아버지를 찾아가 무릎 꿇고 등록금을 빌린 권경민, 거지 같은 사촌 동생의 무례함에도 그저 삭여야만 했던 권경민, 재송 기업 계열사에서 나름 중역을 맡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 속에서 어린 시절 드림즈 야구장에서의 추억과 아버지와의 정 때문에 계속 흔들리면서도 철저하게 냉정한 선택을 해야만 했던 권경민.


극 중반쯤 그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업신여기던 사촌 동생 권경준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여러 인물 중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 장면이었다. 애초부터 구제불능이었다면 끝까지 딸랑이로 나왔겠지. 아마 그랬으면 빌런으로서 매력도 급감했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해 회장의 눈 밖으로 밀려난 뒤 구단 사장실에서 사촌 동생에게 저열한 복수를 당할 때 나도 모르게 내 배를 매만졌다. 무력하게 고꾸라지던 그를 보며 통쾌함이 들기는커녕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그가 신음소리 하나 못 내고 감내해야 했던 부조리한 현실의 억압 또한 드라마 속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도 권경민과 같은 아픔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비루해 보이는 권경민에게 비슷하게라도 공감할 수 있는 상처가 나에게도 있지 않았던가.


예전 안산에 있는 S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 학기 중간에 어떤 교장선생님이 부임하셨다. 오시기 전부터 여러 풍문이 돌면서 선생님들도 다들 긴장 중이었는데 역시 명불허전, 오히려 풍문이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분은 오시자마자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업무 방식에 대해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래, 업무 감독이야 교장 선생님의 고유 권한이니 판단하에 개선해야 할 것은 개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보완을 위해 제시한 방법들이 오히려 비합리적이었고(당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도 동의하였다),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 속에서 선생님들을 향한 고성과 폭언은 다반사였다. 결국 교장실은 버려진 폐가와 같이 모든 선생님이 꺼리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나도 결재받으러 최초로 교장실에 들어갔을 때 무척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이것저것 맘에 안 드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속어를 남발하는데 옆에서 꼼짝 못 하고 그저 들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자리를 빨리 모면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을 열과 성을 다해 듣고 있음을 표현해야 했다. 따로 메모지를 가지고 오지도 않아 생각해 낸 게 손바닥에 받아 적는 것이었다. 갖고 있던 펜을 들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다양한 업무 보완점을 받아 적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내용이 많던지 손바닥부터 시작했던 볼펜 자국이 손등과 팔목 위로 번져 나갔을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그렇게 메모하며 적는 모양새가 무척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나에게 “너는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라고 말을 던지실 정도였으니. 다만 책임져 주시면 오히려 곤란한 상황이 닥칠 것 같아 마음으로만 몇 번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제 인생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를 소심하게 되뇌었다.(학교 선생님으로 사는 것도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만이 아니다. 업무 외적으로도 인신공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언젠가 한 번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내 머리를 보시고 바가지를 쓴 것 같다며 너는 머리가 늘 왜 그러냐, 옷은 왜 그렇게 시꺼먼 옷을 입고 있냐, 북한 사람이냐는 식으로 비수를 던졌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여자 선생님에게도 너도 옷이 왜 그러냐, 좀 화사하고 예쁜 옷 좀 입어라, 칙칙한 둘이 그렇게 같이 있으니 북한에서 막 내려온 부부 같다고 막말을 하시는데 그 여자 선생님도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교장 선생님이 차가 없으셔서 남자 체육 선생님들 중심으로 당번을 정해 안산과 일산을 오가는 운전기사로 삼거나 진로의 날 직업인 초청 시 강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수당을 섭외한 선생님들을 윽박질러 학교에 기부하게 하는 등 부조리한 일들을 매일 같이 나나 다른 선생님들이 감내해야만 했다.(그분의 행적에 대해 10장 이상 더 쓸 수 있지만 이 정도로 줄여야 할 것 같다. 그분은 결국 교육청 감사를 받은 후 집으로 가셨다)


그러고 보면 내가 경험한 부조리한 일들이 이뿐이겠는가. 지면이 길어지니 줄일 뿐이다, 또한 나만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경험했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내 삶을 지키기 위해 권경민처럼 싫은 소리 못 하고 얼마나 자주 그저 머리만 조아렸던 것일까. 권경민을 통해 나를 보았다. 나뿐만 아니라 억압당해 온, 또는 당하고 있는 우리를 보았다. 어떻게든 모진 세상 살아내려고 때로는 비정하게 굴기도 하고, 비겁한 선택을 하기도 했던 권경민이나 나나 다를 게 없었다. 소시민으로 사는 우리의 모습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화는 참 다행이었다. 극 전체에서 내가 뽑는 가장 통쾌한 순간은 권경민의 차지였다. 큰아버지인 권일도 회장 앞에서 싸가지없는 사촌 동생을 누른 채 이자(무려 200억)까지 두둑이 채워놓은 등록금 봉투를 던지는 권경민. 그는 자신을 옥죄던 부조리와 억압에서 자유로움을 선포하고 자신의 뜻과 신념대로 살아갈 것을 선언하였다. 그런 멋진 권경민을 목도한 순간에 내가 느낀 감정이란, 마치 누군가 날 화장실에 못 가게 하여 오줌을 억지로 참고 있다가 그 손길을 뿌리치고 화장실에 달려가 마침내 몸 밖으로 방출할 때의 쾌감, 그 자체였다.(비유가 너무 저속하다면 죄송합니다)


아마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인물이 권경민일 것이다. 백승수야 늘 초지일관, 한결같은 무덤덤함 속의 뚝심이 변함없었고 다른 캐릭터들도 그렇게 변화의 폭이 크지 않은 것에 비해 권경민은 초반과 최종화에서 보여준 모습이 천지차이다. 혹자는 권경민의 변화가 너무 뜬금없다, 너무 이상적인 선택 아닌가, 해피엔딩으로 끝내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극 곳곳에서 권경민이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은 여러 번 떡밥이 뿌려졌었다. 간간이 나오는 아담한 술집에서 술 마시는 장면, 야구공에 대한 미련을 보여주는 장면, 서글픈 한이 느껴지는 아버지와의 통화 장면 등 그가 갈등하다가 결국 자신만의 길을 선택할 개연성은 충분하게 제시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언제든지 의외의 선택을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가? 머리가 현실을 말해도 때로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4. 다시 백승수


권경민의 변화는 백승수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권경민이 갖고 있던 갈등의 씨앗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 백승수를 만나면서 싹을 틔워 나갔다. 그전까지는 대기업 임원 내에서 비슷한 인간들, 성과와 실적을 위해 인간애는 그저 불편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만 만나 보았을 테니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선택은 비정할 수밖에 없다. 백승수가 보여준 휴머니스트적인 신념은 권경민에게 신선한 자극이었을 테고 결국 그도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권경민이 버린 야구공을 다시 권경민에게 전달한 장우석도 백승수와의 만남을 통해 야구인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다시 한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백승수가 장우석을 살리고, 장우석은 권경민을 살렸다.


백승수도 아무 도움 없이 혼자 모든 일을 해낸 것이 아니다. 그를 처음에는 의심하지만 믿고 끝까지 지지하는 이세영이 없었다면 백승수도 중간에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마지막 회에서 백승수가 이세영에게 드림즈를 떠나면서 한 말이 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옆에 있던 사람을 지켜낸 기억이 될 것이라고, 이걸로도 힘이 많이 날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직접적으로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에는 서투른, 이세영에 대한 백승수의 간접적인 의사표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외에도 그를 돕는 많은 손길이 있지 않았던가. 장애우인 동생, 탐문 조사를 대행해 주었던 후배, 마지막에는 권경민까지. 유아독존(唯我獨尊) 하는 독불장군(獨不將軍)이 최선이 아님을 백승수 스스로가 드라마에서 보여 준 것이다.


5. 나와 우리들에 대한 찬가


<스토브 리그>의 엔딩 문구는 다음과 같다.


강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서로 도울 거니까요.


<스토브 리그>가 백승수를 중심으로 보여 준 이야기는 결국 나와 너,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인물이 서로 돕기 때문에 드림즈도 결국 살아남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할 수 있었고, 대다수의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되짚어가며 실추되어 가던 자존감을 회복할 수도 있었다. 우리 차례다.


2월 말, 야구에서의 단장의 시간은 갔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단장과 선수의 구분이 없다. 모든 이들이 단장으로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은 키우는 등 자신의 삶을 계획성 있게 보강해야 한다. 모든 이들이 선수로서 갈고닦은 실력을 삶의 현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하며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 세상을 냉정하고 가혹한 무한 경쟁의 장으로만 만들 것인지, 약한 사람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는 장으로 만들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각각의 심장에서 뛰는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의 네트워크가 너 나 할 것 없이 살게 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마지막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톨스토이는 '사람은 자기 걱정이 아닌, 사랑으로 산다'라고 답한다. 쌍둥이 자매의 어머니가 자신의 죽음 이후 그녀들이 살아갈 것을 걱정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어떤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쌍둥이 자매를 맡아 기르게 되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 사랑으로 돕고 돌보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스토브 리그>가 끝나면서 공은 우리에게 던져졌다. <스토브 리그>가 던진 현실의 공도,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과 대답도 이제 우리가 몸소 실천해야 할 시간이다. 그러니, 강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면서도 서로를 도울 테니까.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삶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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