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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Feb 29. 2020

아빠가 되면서 달라진 삶의 풍경

육아 에세이. 미니 특공대부터 진라면 순한맛까지, 랑람솔 남매 입맛대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조선대의 축구 선수였던 셋째 삼촌을 보면서도,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의 젊은 남자 선생님이 군대에 가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똑같이 머리를 밀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단체 막사에서 자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올 것 같지 않았던 여러 순간은 알고 보니 이미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급격하게 거리를 좁혀 나를 휘감았고 내 삶을 그때마다 바꿔 놓았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순간의 선택은 자유이지만 바뀐 환경에 대한 적응은 강제 미션이다. 잘 적응하면 고만고만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름 나름 불행하게 사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입학 초기부터 금세 적응하여 잘 지내온 줄 알았는데 졸업하면서 대학 생활을 돌이켜 보니 실제로는 끝까지 적응하지 못한 채 대학을 마쳤던 것 같다.(수많은 실수와 아쉬움, 후회의 감정이 더욱 많이 나를 잡아채더라) 군대는 정반대였다. 훈련병, 이등병 때만 해도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중에는 군대가 체질인 느낌으로 잘 지내기만 했다. 지금도 그렇다. 여전히 달라진 환경에 적응 중인 것이 있으니, 바로 아빠로서의 삶이다.


아빠가 된 지도 벌써 6년 차에 접어들었다. 결혼은 언젠가 하겠지, 애도 언젠가 낳겠지,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것이 어느덧 현실이 되었다. 첫째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특별히 차근차근 준비를 잘해서 아빠가 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만전을 기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첫째가 나와 버렸고, 그 후로는 달라진 환경에 임기응변으로 적응해야만 했다. 일찍 결혼한 과 동기가 출산하여 친구들과 함께 안부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 친구가 낳은 아기를 보고 엄마로 살고 있는 그 친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다지 실감은 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한 편을 그냥 우와 하며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랬던 나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불가항력적으로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초대되었다.(액션, 멜로, 공포, 판타지, 코미디, 감동 드라마 등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엄청난 영화다!) 육아의 주인공으로서 아빠가 경험하는 삶의 풍경은 주변인이었던 이전과는 천지차이였다. 몇 가지만 꼽아보겠다.




아빠가 되면서 달라진 것들


1. 동선과 만남


아이들이 생기기 전에는 집, 학교 말고도 그날 약속에 따라 다른 장소가 동선에 추가되곤 했다. 번개모임을 좋아하는 편이기에 퇴근 후 학교 선생님들과 사적인 모임을 갖거나 다른 지인들을 가끔 만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집-학교-집’으로 단순화되었다. 그러다 보니 매번 만나는 사람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강릉에 정착하면서 가까운 거리에 지인이 별로 없는 것도 큰 원인이다) 이러니 답답할 때도 있지만 별 수는 없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는 다르게 엄청 외향적인 성향이어서 내가 어렸을 때 집에 계시기보다는 바깥으로 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셨다. 어머니와는 그래서 자주 충돌했었고,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저런 것은 본받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지금 내가 같은 실수를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다양한 사람을 못 만나는 것은 아쉽지만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과 친밀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아빠로서 0순위라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2. 소비 습관과 생각


나는 IT 기기를 구입하는 것을 좋아한다. 최신 제품을 사서 1년 정도 쓰다가 중고로 다시 팔고 새 제품을 다시 사는 편인데 태블릿이나 노트북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거래 중에 이익을 많이 남기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최신 제품을 자주 써보고 싶어서 중고 거래를 활발히 했던 것이기에 솔직히 이런 거래를 자주 할수록 손해만 쌓이는 패턴이었다. 한 마디로, 아주 좋지 않은 소비 습관과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그래서 많이 혼났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위한 소비, 내 취향의 소비 패턴은 거의 사라졌다. IT 기기는 1년 넘게 쓰고 있으며, 옷도 거의 7~8년이 되었어도 입을 만하면 그냥 입는다. 다른 것도 처지는 비슷하다. 중고 거래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거기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을뿐더러 손해를 보지 않을 자신도 없다. 애가 셋이나 되기 때문에 최대한 경제적으로 살아야 한다. 다만 새롭게 생긴 소비 습관은 있다. 항상 장을 볼 때면 아이들이 먹을 킨더 조이 초콜릿이나, 하리보나 마이 구미 같은 젤리, 죠스 바나 수박 바와 같은 아이스크림은 늘 잊지 않고 사게 된다. 작은 간식거리를 사서 현관문의 초인종을 누르면 아이들이 “와, 아빠 왔다!”하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즐겁게 간식거리를 먹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진다. 아빠든, 아빠가 사 오는 간식거리든, 무엇을 정말로 기다렸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이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은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3. TV 시청


나는 TV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보던 ‘무한도전’이 끝난 후로는 TV를 끊었다. 최근 어쩌다 ‘스토브 리그’를 접하게 되면서 딱 그것만 보다가 종방 되고 나서는 다시 TV랑 멀어졌다. 이런 나도 아빠가 되면서 TV에 나오는 아이들 애니메이션은 줄줄이 알게 되었다.(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게 은근히 재밌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느낌으로 흥미진진하게 소파에 앉아 아이들과 같이 보기도 했다.(물론 나중에는 너무 많이 봐서 내용을 다 외워버렸지만)


미니 특공대의 최신 시즌은 슈퍼 공룡 파워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전 시즌의 심각함은 어디 갔다 팔아먹었는지 악당들이 다 코믹하게 나온다.(심지어 구슬 뽑기 괴물은 사투리를 쓰는 친근한 옆집 형 같다) 첫 번째 시즌의 주 빌런인 파스칼이랑 나인은 기를 쓰고 동물 왕국을 정복하여 세상을 지배하려 했지만 다 실패한다. 항상 나와라 기계몬을 외치지만 하나씩만 나오니 역시 별 수 없다. 주인공들은 악당 하나를 두고 매번 집단 폭행하니, 이쯤 되면 악당이 불쌍할 지경이다. 그냥 기계몬을 아껴놓았다가 한꺼번에 돌진시키면 될 일을 가지고 일을 어렵게 만든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미니 특공대 최고의 시즌을 꼽으라면 미니 특공대 X 펜타트론이다. 이 시즌의 주 빌런인 제노스는 최종 보스로서의 품격이 있다. 외양도 멋스럽고 목소리도 무게감 있으며 특히 악당 주식회사의 대표로서 부하의 실수를 매번 용서해 주고 오히려 힘을 더 불어넣어주는 너그러움 또한 갖고 있다.(하지만 그 너그러움이 결국 회사를 망하게 하는 것은 함정) 각 회마다 등장하는 악당들도 개성이 독특한 편이고 무조건적으로 미니 특공대에게 당하지만은 않는다. 제노스가 불행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지구를 침략하는 것은 파스칼과 나인이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 동물 왕국을 먼저 정복하려고 용을 쓰는 것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상좌 : 제노스/ 상우 : 파스칼 / 하좌 : 나인 / 하우 : 슈퍼 공룡 파워


이외에도 헬로 카봇은 벌써 시즌 8까지 전개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 지니키즈의 공룡 만화를 통해 각종 공룡의 이름을 다 외우는 등 아빠가 되기 전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것에 내 정신력을 쏟고 있으니 참 신기하기도 하다.

좌 : 지니키즈 공룡만화 / 우 : 헬로 카봇


4. 음식, 그중에서도 라면


매운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음식을 맵게 먹는 것은 포기하지 못한다. 순대 국밥이나 갈비탕 같은 것을 먹을 때 다진 양념이나 고춧가루, 그리고 잘게 썰은 고추 등을 반드시 타서 먹는다. 떡볶이나 라면도 매운맛, 만두는 김치만두, 수제 버거는 주로 멕시칸 칠리소스류 등 저절로 매콤한 것에만 손이 간다. 하지만 아빠가 되고 나서부터 아이들과 함께 먹는 음식에서는 오히려 매운맛을 피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라면을 좋아하는데 한 번은 매운맛 라면을 끓여줬다가 애들이 우유만 계속 들이킨 적이 있었다. 이후로는 진라면 순한 맛만 사서 끓인다. 물론 매운맛을 따로 사서 혼자 끓여먹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다. 종류가 다른 라면을 두 봉지나 자주 사지는 않기 때문에 매운맛 라면하고는 사실상 작별했다.(아껴야 산다, 또 라면을 많이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5. 집안일


결혼하고 나서도 집안일이 익숙하지 않아 아내랑 자주 충돌했다. 나는 집안일을 도와준다고 생각했고 아내는 집안일을 같이 한다고 생각했던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도 육아나 집안일에 소극적이어서 아내를 고생시켰다. 아내가 아무래도 나보다는 더 긴 시간 동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힘들었을 테니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육아나 집안일에 보탬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그렇게 무수한 갈등을 겪으면서, 나 스스로도 성찰하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 결국 삼 남매의 아빠가 되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은 있겠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자평하고 싶다. 예전에는 그냥 누워서 핸드폰이나 책만 보고 있다가 아내가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할 때만 굼뜨게 움직였다면 지금은 다르다. 눈에 보이는 집안일이 있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처리한다. 빨래도 많이 싸이면 세탁기와 건조기로 보내 버린다. 아내가 아이들을 보느라 힘들어하면 부엌에 가서 조용히 설거지한다. 어지럽혀진 거실과 방을 청소하는 것은 기본이다. 아빠로 산다는 것은 아이들만 케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컨디션까지도 케어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아마 아빠로서 사는 삶에 적응 완료할 날은 평생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크는 것은 아니니까, 크면서 계속 변할 것이 분명하니까, 아빠로서 대응해야 하는 환경도 지속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니 사전에 잘 준비된 완전체 아빠가 되지 못했다고 하여, 적응을 빠르게 끝마치지 못했다고 하여, 나름 나름 불행한 삶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완벽주의는 필요 없다. 그러니 여기선 고만고만 행복하다고 느끼며 그저 순간순간 성실히 적응해 나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아빠를 계속 필요로 할 것이고, 그런 아이들에게 불행한 아빠보다는 행복한 아빠를 선물로 주면 더 좋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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