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에세이. 우리 아이들, 어린이집 차에 태우는 아빠의 즐거움에 관하여
어느덧 2월도 다 지나갔다. 길었던 겨울 방학도 끝을 고하니 이제 학교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방학 동안 도맡았던 두 아이의 등원 전쟁에서도 해방이다.(담담한 문체지만 속으로는 만세 삼창, 아, 아내, 미안해요.)
등원, 직접 시켜보니 나에게는 엄청난 인내심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분명 그렇지 않은 집도 있을 것이다. 습관을 잘 들여서 아이들이 아침에도 이른 시간에 잘 일어나 세수, 옷 입기 등 나갈 준비도 여유롭게 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통학 차량을 타니 울지도 않고 편안하게 잠시만 안녕하는, 그런 엄마, 아빠도 이 세상에 존재하겠지. 그저 부러울 뿐이다. 등원이 우리 집에서 이리 빡센 작업이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부모의 문제(특히 아빠, 늦게 들어와서 늦게 자니, 아이들도 거기에 맞춰 늦게 자는 듯) 일 것 같고, 이차적으로는 아이들의 성향도 하나의 요인일 것이라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역사적으로 회자되는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문학동네 판)처럼 등원의 풍경도 그런 것 같다. 행복한 등원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난감한 등원은 나름 나름으로 난감하다.(엄밀히 말하면 불행까지는 아니니까) 우리 집에서는 보통 아이들이 밤 11시 넘어서 잠이 들고 거의 기절한 상태로 다음 날 아침 9시쯤에 간신히 일어난다. 그것도 첫째나 그렇지, 둘째는 자기 애착 이불을 다소곳하게 덮은 채 그 시간까지도 계속 자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아이는 셋째다. 이제 8개월 된 솔이가 요즘에는 팔도 안 쓰고 발바닥만을 사용하여 뱀처럼 스르륵스르륵 기어 다니면 8시에서 8시 30분이다. 그럼 아내는 솔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도 갈면서 셋째를 챙긴다. 나는 그 사이에 씻는다. 요즘은 8시 30분 되면 학교를 향하지만 몇 주 전만 해도 10시쯤 나가니 내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씻고 나오면 8시 50분쯤 된다. 나부터 먼저 대충 옷을 입고 나서, 자고 있는 첫째를 번쩍 들어 화장실로 데려간다. 간혹 먼저 일어나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상태로 함께 한다. 무릎에 앉혀 놓고 양치시키면 잠이 좀 깨 스스로 어푸어푸 세수한다. 그렇게 되면 첫째는 걱정 없다. 혼자서도 옷을 입을 수 있으니 이제 둘째에게 간다. 이때가 9시 10분쯤인데 여기서부터 난관이다. 둘째가 가뭄에 콩 나듯 먼저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면 제일 베스트다. 그날은 등원이 아주 유쾌, 상쾌, 통쾌하다.(하지만 그런 호사가 자주 있을 리가 없지) 대체로는 자고 있는 경우가 많아 첫째 때처럼 번쩍 안아 든다. 그럼 애착 이불과 자동적으로 이별하게 되는데, 이불이 없다는 것을 감쪽같이 알아채고 엄청 짜증을 낸다. 이렇게 되면 양치와 세수는 못 할 확률이 높다. 반대로 슬금슬금 옆으로 가서 살살 깨우면 또 안 일어난다. 계속 자려고만 하니 결국에는 다시 번쩍 들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따 먹을 아이스크림이나 킨더 조이로 달래지는 경우에는 기분이 바뀌기 전에 매우 신속히 준비를 시킨다. 달래지지 않으면 뭐, 어쩔 수 없다. 그냥 옷만 갈아입히고 양치와 세수는 어린이집 선생님께 맡기는 수밖에…….(선생님, 죄송하고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린이집 차가 9시 25분쯤 집 앞으로 오기 때문에 둘째를 준비시킬 때부터는 마음이 급해진다. 차에 탄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기다리게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 해지는 아빠와는 달리, 아이들은 장난치고 빈둥빈둥 대며 옷을 입는다. 둘째가 옷 입기 싫어 자꾸 달아나면서 자기 애착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잡으러 가고, 첫째는 첫째대로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며 요구 사항을 계속 이야기하면 시중을 들어줘야 하니, 정말 시장통에 온 것 같이 정신없다. 이럴 때 나조차도 잠이 부족해 피곤한 상태면 절로 분노의 사자후를 내지르게 된다.
언젠가 한 번은 아내도 교육 때문에 9시 30분에 나가야 하고, 그래서 셋째의 아이 돌보미 선생님도 그 시간에 맞춰 오시기로 했다. 나도 그 시간에 외출해야 돌보미 선생님이 편하게 셋째를 집에서 돌보실 수 있으니, 덩달아 나갈 준비를 했다.(일정이 없으면 나름대로 만들어서라도 나가야 한다) 아빠나 엄마 모두 9시 30분에 외출하려고 준비하면서, 첫째와 둘째의 등원 준비도 같이 해야 했고, 더욱이 외부인이 오기 때문에 집도 깨끗이 치워놓아야만 했다. 이날 아침은 너무 분주하고 이것저것 계속 신경 써야 해서 오랜만에 이석증이 도지는 느낌이었다.(머리가 핑핑 돕니다, 실제로…….) 나루토의 그림자 분신술을 쓸 수만 있다면야 더는 소원이 없을 것 같은 아침이었다.
쓰다 보니 등원에 대한 힘들었던 경험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등원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고 싶은 순간도 물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준비를 다 마치고 두 아이의 손을 잡은 채 통학차량이 멈춰 서는 곳까지 걸어가는 그 순간, 양옆에서 딸과 아들이 내 손을 꼬옥 붙잡은 채로 거리의 여러 사물을 가리키며 세계를 탐구하는 순간, 차를 탈 때 나를 두 팔로 안아주면서 아빠, 안녕, 그렇게 인사하는 순간은 등원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훈훈함이다. 사실 이 순간만으로도 준비하는 과정 속의 모든 고단함을 다 보상받는 기분이다. 아내가 아이들을 직접 차 타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나를 배려해 줘도, 나는 노 땡큐다. 이 기분을 만끽하려고 고생스러워도 아이들을 준비시키는데 죽 다 쒀서 다른 사람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등원은 한 번 맛 들이면 힘들어도 끊을 수 없는 매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기존 맛집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면 새로운 맛집을 탐색해야 한다. 등원시키는 즐거움 또한 당분간 맛볼 수 없게 되었으니 새로운 즐거움을 탐색하는 것은 아빠로서 필수 코스다. 아마 분명히 처음 맛집만큼 맛있는 집이 나타나리라. 새로운 집에서 그 맛에 감격하며 즐거움을 누리다가 여름이 되면 다시 기존 맛집도 이용하게 될 테니, 아빠의 웃음꽃에 그늘질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