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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Mar 15. 2020

오직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7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A.J.크로닌, <천국의 열쇠>

  소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걱정하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아마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지금과는 다르게 상당히 호의적일 것 같았다.

  “걱정과 불안을 넘어서더라도 혼자서는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이 닥칠 수도 있어. 그럼 혼자가 아니라 둘이, 둘도 아니면 셋이, 아니면 그 이상이 함께 넘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톨스토이는. 그러니 서로를 돕는 사랑으로 산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야.”

  폭풍처럼 작품을 해석하는 속도에 소년은 집중하려고 애썼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첫 번째 답처럼 바로 우리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덕성을 흘러넘치게 하면 누구나 사랑을 느끼며 사랑하며 살게 되는 세계를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강조했어. 우리 안에 무엇이 있냐고 마트료나가 받았던 세묜의 질문 기억나?”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짝 하고 손뼉 치며 대답했다.

  “마트료나, 당신의 마음속엔 하나님도 없소? 맞아요?”

  그는 흡족하게 웃었다.

  “결국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사랑이자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한복음 4장 16절. 톨스토이가 말년에 강조한 하나님이자 사랑에 귀의하자는 톨스토이 주의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까? 그럼 그 사랑이 이 작품 속에서는 누구로부터 시작한 거라고?”

  “세……, 묜?”

  “빙고! 그래, 세속적인 명예도, 부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하층민 세묜의 작은 선행으로 보살핌 받은 미하일이 결국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을 보면, 인간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남들 보기에 뛰어나지 않아도, 부유하지 않아도, 잘 생기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자격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

  그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책방 안은 짧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소년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오직 사랑으로 산다는 건 말이야, 자격과는 상관없어.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세묜이 미하일에게 겉옷을 입혔던 것처럼 네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그저 하는 것이지. 아까 소연이를 짝사랑한다고 했지? 네가 소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모양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원리는 같아. 너, 소연이를 사랑하는 데 스스로 자격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질문이 소년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소연이를 멀리서만 바라봤다. 그녀에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저씨의 말을 들은 지금도,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크고 소연이에게 미울 받을 용기가 없어 주저되었다. 아저씨의 말대로 사랑에 자격이 없다면 한 번 도전해 보고 싶건만, 그동안 세상 속에서 체득했던 편견 때문에 주저앉았다. 소연이를 정말로 좋아하는지 되묻기도 했지만,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아련한 것을 보면 역시 이 감정은 가짜가 아니다. 소연이를 좋아하고 있다고, 아저씨와의 대화를 거치며 그렇게 나름대로 결론 내리는 중이었다.

  “자격 없으면 포기할 거냐?”

  “네?”

  “소연이를 포기할 거냐고. 지금 이대로 지내는 것에 만족해? 앞으로도 사랑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나 행동할 거야? 언제쯤 그런 자격을 갖출 수 있을까?”

  그는 소년이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춰진 열망이 있기에 이 책방을, 그리고 자신을 찾아왔으리라.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소심했던 소년이 지금은 대담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오, 아저씨, 포기 안 해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 왔는데 이번에도 포기하면 못 살 것 같아요. 저는 정말로, 소연이를 좋아해요.”

  간절하면서도 확신에 찬 소년의 말에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다행이네. 너에게나, 나에게나…….”

  그는 쿡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정도 결심이 서야 사랑이지. <천국의 열쇠> 주인공인 치셤이 겪었던 일만 보면 말이야, 사랑을 그저 황홀하고 달콤한 감정이라고만 여기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고 코끼리는 기둥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것이랑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치셤은 어땠는데요?” 소년이 말했다.

  “미움을 많이 받았지. 9살 때 고아가 된 치셤은 커서 신부가 되었는데 당시 일반적인 신부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거든. 매너리즘에 젖어든 여타 신부들이 신의 사랑을 몸소 전해야 할 주민들보다 자신을 더욱 사랑할 때 오히려 치셤은 헌신적으로 주민들에게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했어. 대표적으로 동문이었던 안셀름은 외모와 말주변 모두 훌륭했지만 자신의 강점을 출세를 위해서만 사용했지, 신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종교 권력에 더욱 집착하는 그야말로 작품에서 이상적인 인물인 치셤과 대비되는, 부조리한 현실이 반영된 인물이 아닐까? 

  누구보다도 주민을 사랑했기에 미움받은 치셤은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끝끝내 먼 나라, 중국의 선교사로 보내지게 되는데……, 거기서도 펼쳐진 일은 가관이야.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전임자가 선교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 놓았다고 들었거든? 막상 가보니 아무것도 없어. 정말 없어. 성당 터라고도 할 수 없는 흙더미들과 마지막 신자라고 남은 왕 씨 부부도 사기꾼, 도둑이니,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아마 포기했을 법한 상황이었지. 치셤은 그 극한 상황에서도 신의 사랑을 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사람들을 도왔어. 크로닌이 의사 출신인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 있는데,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 하다가 진료소를 차리거든.(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의료 봉사로 선교한 시대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픈 사람을 돌보면서 진심을 전하고 그 사랑에 감격받은 사람이 점차 늘어나면서 성당도 새로 건축하게 되는 등 해피 해피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홍수로 성당이 무너지고, 정부군이나 비적들에게 시달리고,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는 도와주러 온 무신론자 의사이자 친구인 탈록이 죽고, 2차 세계대전도 경험하고, 비적들에게 납치되어 고문을 받아 다리를 절게 되고, 정말 선교하며 경험할 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다 겪었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치셤은 고초를 겪지.(정말 이렇게까지 주인공을 굴려야 하나 싶다) 35년 후 다 늙어서 고향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이단 취급받으면서 안셀름이 보낸 슬리브가 조사관으로 파견되거든, 타지에서 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긴 시간 동안 헌신한 성직자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가 있나 싶으니, 어떤 독자 입장에서는 안셀름에게나 또는 작가에게 분통 터질 수도 있지.”

  소년은 잠잠했다.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라지만 도저히 자신으로서는 감히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치셤이 존경스러웠다. 오직 사랑을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평생을 자원하여 봉사하고 사람들을 사랑했던 치셤이 대단해 보였다. 그의 초지일관된 태도, 어떤 역경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한 신념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불씨가 심어진 것 같았다. 아저씨와의 대화가 끝나면 나중에 한 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소년은 말했다.

  “아저씨, 그래서요? 마지막에 어떻게 됐어요?”

  “슬리브가 자신이 작성한 조사서를 막판에 찢어버려. 아주 멋지게. 그가 외친 한 마디가 인상적이야. 주여, 저 노인에게서 바른 교훈을 얻게 해 주십시오. 내가 결코 그를 해치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아저씨, 슬리브란 인물도 대단한 결단을 한 거네요.”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야기해보라는 듯 재촉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파견한 안셀름의 마음에 들 만한 내용으로 조사서를 작성해서 보고했으면 안셀름이 슬리브를 앞으로 잘 봐주고, 음, 뭐냐, 라인을 탄다고 하나? 그 안셀름 라인으로 출세에 많은 도움을 받았을 텐데 말이죠. 그걸 다 포기한 거잖아요.”

  “좋은 해석인데. 결국 슬리브도 치셤에게 교훈을 얻었겠지. 진정한 사랑은 뭘까?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태도는 뭘까? 아마도 성직자로서, 한 인간으로 마땅히 살아야 하는 법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는 소년의 해석을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내용보다도 태도가 계속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백미였다. 소년이나 그나 치셤의 삶을 상상하여 그와 만나보는 잠깐의 여유를 즐겼다. 이윽고 소년이 말했다.

  “사랑이란 그런 것 같네요. 자격과 상관없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실천하는 것. 어떤 고난과 시련,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신념을 관철해 나가는 것.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까지도 내 삶의 테두리에 넣어 함께 하는 것. 맞나요?”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느꼈으면 그게 맞는 것이겠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정답을 찾는 문제 풀이가 아니니까. 느낀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

  그가 잔에 남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다 마시고 소년을 침묵 속에 응시했다.

  “이야기는 거의 다 끝났고 시간은 한 5분 남았구나. 자, 그럼 이제 마지막 거래를 해 볼까?”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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