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지 않다는 축복
우리는 끝을 통과하여 비로소 현재에 도착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영원한 것 같던 해도 저물어 벌써 끝이 다다랐네. 어떤 것이 끝나듯 밀려날 때 그렇게 새로운 것을 끌고 당겨 오는데, 어쩐지 삶의 연수가 늘어날수록 설렘 뒤섞인 두려움 같은 게 점점 커지는 것 같아. 나는 아직 젊다고 작은 점 같던 그것을 바라보기를 무기한 미루어두려고 했는데 말이지. 문득 다시 무게를 짊어지니 그런 것은 나이와 무관한 것이더라. 그렇게 생각하니 헛된 부담은 줄고 기분 좋은 무게는 늘어났어. 삶 자체를 나잇값이라는 상투적인 말에 가둬지지 않기로 하자고.
모두가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라고 있어. 난 이게 참 좋아. 우리가 약 구십 살 산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순박하게 행복을 바라는 날이 적어도 삶에서 구십 번은 된다는 거니까. 물론 늘 그렇진 않겠지만, 비교적 다른 날보다는 그렇다는 거야. 지난해를 보낼 때는 과거의 온 슬픔을 보내는 것처럼 상쾌하게, 다음 해를 맞이할 때는 다가올 온 미래를 밝은 일이 가득한 것처럼 희망차게. 우리가 언제 그렇게 순진무구하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난 왜인지 연말연초가 그리 설레진 않아. 크리스마스도 그랬어. 우리가 평범하다 이르는 날과 다른 건 이름뿐이야. 기념하는 대상들의 차이도 있겠지. 특히나, 새해도 어떤 날들의 끝과 시작일 뿐인 거잖아? ‘날’의 개념에서 ‘년’의 개념으로 바뀌었을 뿐, 내가 하루가 끝날 때마다 그 하루를 보내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여. 물론 커진 단위 덕에 느껴지는 게 좀 더 많긴 하겠지만, 그래도 본질 상 같다는 거야.
너무 감정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 요즘 날짜 개념도 흐릿해지고, 특별한 날처럼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 있어서 그런가 봐.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다. 어쩌겠어, 내가 이런 사람인 걸.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우리 삶에서 완전히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는 것.
그런 거라면, 달력에 쓰이는 특별한 빨간 날이 얼마든지 많아지든 상관없을지도 몰라. 달력 아래 놓인 보드마카를 다 써도 좋으니 마구 특별한 날을 만들자. 그렇지 않다면, 마치 하루하루를 특별한 것처럼 살아가자. 매일이 연말연시, 12월 31일과 1월 1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녁마다 손을 잡고 이야기하자. 오늘 보낸 하루는 시원하게 보내고, 내일 맞이할 하루는 행복하길.
그리고 기도하자. 우리만의 송구영신을 드리자. 지나간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이 생기길. 주어진 하루를 감사하며 보내길. 순간과 순간 사이에서 나타나는 축복 같은 아름다움을 보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감탄의 기쁨을 주시길. 신의 얼굴을 한 사람이 불쌍하게 누워있을 때, 잃을 것을 걱정 말고 줄 것을 아까워 말길.
하나의 끝이 또 다른 것의 시작이라는 것에 너무 연연 말길,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길.
어떤 것에든 끝이 있다면 시작이 있어. 이번 한 해에 지독할 정도로 뼈에 깊이 서린 것이 떨쳐지기도 했지. 그게 지나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 후에는 또 다른 고통이 또 있더라. 그런 거 같아. 끝이 있다면 시작도 있는 거지. 아니, 아예 끝은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것은 때론 두려움을 자아내는데,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우린 웃고 있어.
백치 같은 웃음으로 오해를 사는 일이 많아지길 바라는 요즘이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순수한, 아주 순수한 행복은 우리에게 때 묻지 않은 결백을 주는 것 같거든. 무거운 것도 가볍게 만들고, 불안한 때도 순간으로 줄여주지.
무언가가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야. 막연하니까. 하지만 우리가 오늘 웃는 것을 기억하자. 지금 우리는 웃고 있어. 끝과 시작 사이에서.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아는 걸지도 몰라. 그저 오늘처럼, 매일을 오늘처럼. 끝나고 시작되는 자정의 새벽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듣고서, 잠들기 전에 항상 그 소리를 떠올려보는 거야. 오늘이 끝이 났다. 내일이 온다. 그리고 웃자. 웃어버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웃는 걸까? 아냐. 되려 그러니까 웃는 거야.
그러니 오늘 기뻐하자.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어도 그렇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자. 항상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우리와 맞닿아 있으니, 그것을 언제까지나 느끼자. 느끼고 받아들이자. 받아들이고 사랑하자. 사랑하고, 또 사랑하자. 다가올 허망한 설렘도, 지긋한 무게도, 처량한 희망도. 모두 사랑해 버리자.
오늘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순간에, 원대한 시간의 시작과 끝이 다가오고 있어. 그걸 잘 기억해 두자. 기억한 만큼 애써서 사랑하자. 오늘이 지나면 다가올 내일에, 그리고 내일들에, 오늘들에. 우리의 사랑을 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