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대하여

올무

by Blooboii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더니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보라,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1-35



걸맞지 않은 인간이 있다면 멀리 해도 좋다는 생각이 든 건 내 머리가 조금 더 크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그전에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나의 곁을 늘리고 나를 부수었다. 이른바 열정에 소진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룬 바를 보고서 기뻐하나 나에게 남은 것은 성취감에 가까운 쾌락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적인 기쁨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기심과 이타심은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둘로 나누고자 애를 썼으니. 결국 두 가지가 하나의 궤를 타고 흐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내 윤리의 시초는 건강함이 되었다. 또한, 도덕률을 지키는 의무심 이전에 진정한 기쁨이 틔워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니 무언가 가까워지는 듯했다.


칸트가 아마 그런 말을 했던가. 법칙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이기는 건 법칙을 향해 감탄하고, 그것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어쩌면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사랑하는 것보다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과거의 장면으로 남아 있다기보단 나의 안에 깊이 서린 하나의 상으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있다.


그러니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닌 가족을 만난다면 어떨까.


올무 같은 관계의 명명.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위해 장기와 쓸개 전부 빼주는 건 위대한 사랑이거나 그 무엇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 맞지 않은 사람이 “가족”이라면? 그래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피를 흘려 배를 갈라야 하나?


허나 진정한 문제는 누군가가 나에게 그 사랑을 보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다.


피 묻은 장기 앞에서 의무감을 느낀다. 그들의 혈관에는 나와 같은 피가 흐른다. 허나 전혀 닮지 않았다. 성씨, 촌수, 돌림자, 이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나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숨통을 조이는 내면의 법칙이 스스럼없이 나를 옭아매고, 나는 다시 이름을 잃어 사돈의 팔촌이자 피를 나눈 혈족이 된 것이다. 축복의 이름을 한 저주는 이미 사주팔자와 운명을 뛰어넘었다. 쥐어지는 현금 다발은 도리 없는 책임이다. 여기서 나는 당신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기대를 채워주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다는 건 호래자식을 넘어 인륜을 배반한, 어쩌면 내 안에 남은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짓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모여 있으면 기쁜 사람이 있다. 피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굳이 내 이야기를 저쪽에서 이쪽까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긁어내야 한다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피보다 진한 물이 있다는 거다.


하면 가족이란 무엇인가. 택할 도리 없었으나 나타나자마자 나의 운명을 이루었던 그들은 그 누구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인가? 그렇다면 내가 명절 때마다 그들을 찾아보는 것에 대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유는, 같은 피를 나누었는데도 내 피의 색과 온도가 다르기 때문인가? 어째서 가족이라는 말, 그 가장 좁은 의미의 테두리로, 나를 규정시키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악착 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내 슬픔이 안겨본 적이 없는데. 오로지 나의 모습은 역할일 뿐이었는데. 내 손을 잡아주고 함께 피를 흘린 이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같은 피가 속에 흐르는 자들이 가족인가? 다른 피이지만 함께 흘린 자들이 가족인 거?




어쩐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여전히 대답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아직도 없기 때문에?


여전히 나는 떠도는 씨앗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