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에 큰 영향을 끼치는 특별한 정신이 있는 것 같다.
헤겔을 비롯한 독일인들은 그 특별한 정신을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불렀다.
어떤 시대를 관통하는 지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사상이 있다고 믿고 그 사상을 시대정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충효예지신 같은 가치관이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가치관을 지키지 않으면 집안에서 쫓겨나고, 마을에서 쫓겨나고, 조선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충효예지신의 가치관이 그렇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지는 않다.
공동체의 영향도 자연스레 약화되었다.
오히려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는 것보다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짙다.
“공부해서 남 주냐? 다 너를 위한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인가?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개인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중세 유럽사회의 시대정신은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가치관이 아니라 굳이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르침이 반드시 일치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파문을 당하였다.
인권이 박탈당했다.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기도 했다.
영혼까지 침탈당하였다.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하면 죽는시늉까지 했어야 했다.
유럽사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동일한 시대에 아랍지역에서는 '알라의 말씀'이 시대정신이었다.
하루 다섯 번 “알라 아크바르(알라는 유일하다)!”를 외치는 이들이었다.
알라에게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면 땅에 엎드려 절했다.
자기들을 ‘복종하는 자’라는 뜻의 ‘무슬림’이라고 불렀다.
그들에게는 알라가 전부였다.
알라를 위해서라면 물속에도 뛰어들 수 있었고 불속에도 뛰어들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시대정신은 오직 알라를 위해서였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각 시대를 아우르는 절대적인 정신이 있다고 하면서 각 시대를 구분하면서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시대가 칼로 무 자르듯이 정확하게 자르고 구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392년에 이성계가 고려를 폐하고 조선을 세웠지만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고려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유교를 받아들이고 불교를 배척한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위대한 임금인 세종대왕도 <석보상절>이라는 불교서적을 간행했다.
궁궐의 여인들은 기회를 엿보아서 ‘봉은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아무리 유교사회라고 하지만 불교 정신을 뿌리째 뽑아낼 수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퇴계 이황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였던 율곡 이이도 한때는 머리를 밀고 사찰에서 수행을 하였다.
몸은 유교 사회에 갇혀 있었으나 정신은 불교 사회에 가 있었다.
이처럼 시대정신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물질만능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세속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말들을 다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말들로 오늘날의 시대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다.
오늘날에도 집안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삶을 개인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들이 집안과 회사와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이면에는 그렇게 사는 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삶이 개인주의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만 보더라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딱 잘라 이야기할 수 없듯이 시대도 이런 시대다 저런 시대다 똑부러지게 구분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모든 시대가 똑같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시대는 살고 싶은 시대이다.
살고 싶은 정신이 모든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