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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탈이 심한 날, 구사일생을 생각한다

by 박은석


몸에 힘이 쭉 빠진다.

피곤한가?

지난밤에 잠 잘 잤는데.

며칠 동안 몸을 혹사해서 그런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힘든 일은 아니었는데?

이 불쾌한 기분을 뭘까?

안정을 취해보려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뱃속에서 부글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점심식사로 먹은 음식이 상했었나?

나름 동네에서 맛집이라고 소문난 해장국집인데 오늘도 사람들이 많아서 겨우 한 테이블 차지해서 먹었는데.

다른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 먹은 것이라곤 뼈해장국과 커피가 전부였다.

아침에 간단히 소금빵 하나에 물 한 잔이었다.

음식이 상하지 않았다면 내 몸이 그 음식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까스활명수 한 병을 마셨다.

조금 지나면 소화가 되겠지 기대하고 있다.

배탈을 앓았던 적이 까마득하다.

당황스럽다.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릴 것 같다.

죽다 살아난 기분을 느낄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연세대학교 채미현 교수의 <상식 밖의 고사성어>라는 책이 떠올랐다.

책머리에 죽다 살아난 이야기가 실려 있었던 기억이 났다.

다시 그 책을 펼쳤다.

‘구사일생(九死一生)’ 그래 맞다.

오늘 밤은 내가 구사일생할 것 같다.

아니 구사일생을 할 수 있으면일사일생 좋겠다.

구사일생 못하고 일생일사(一生一死)해 버리면 안 된다.

오늘밤에는 화장실에 아홉 번 들락거리더라도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딸아이가 아기였을 때 생각이 난다.

말문이 트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는데 툭하면 엄마 아빠에게 “죽지 마!” 명령했었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죽지 말라고 외쳤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언젠가 죽겠지만 지금 죽으면 안 된다.

겨우 배탈 좀 앓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다.

아직 견딜만한가 보다.

그런데 자꾸 배가 아프다.

기분 나쁜 통증이 계속된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채미현 교수는 한자에서 숫자 ‘구(九)’ 자는 가장 큰 수라고 한다.

최대치라는 것이다.

이해된다.

‘영(0)’이라는 숫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숫자이다.

존재하는 것의 숫자는 하나, 둘, 셋....

순으로 세다가 아홉까지 간다.

9가 가장 큰 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홉 번 죽는다는 ‘구사(九死)’는 죽고 죽어서 완전히 끝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뒤에 ‘일생(一生)’이 붙었다.

그러면 죽고 죽어서 완전히 끝나가다가 살아났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천만다행(千萬多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과연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죽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것도 아홉 번씩이나 죽음의 문턱 앞에 간다면, 아니 수없이 많도록 죽음의 문턱 앞에까지 간다면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 고통을 끝내달라며 죽여달라고 하늘에 탄원하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택했다.

아홉 번 죽음의 문턱에 서더라도 단 한 번이라도 살 수 있다면 그 살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먹을 게 없어서 죽을 위협에 몰렸을 것이다.

전쟁 때문에 죽음 앞에 섰을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죽고 싶었을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죽음 앞에 다다랐을 것이다.

‘캭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래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희망이 있었냐고?

희망 같은 것은 애초부터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희망이 보였다면 그 자리까지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삶과 죽음이 별 차이가 없다면 사는 쪽을 택하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어차피 한 번은 죽는 인생이지만 살다가 명이 다해서 죽는 길을 택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은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눈물 속에 나온 말일 것이다.

‘생이 끝나는 날까지 끝까지 살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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