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보았는데 남은 저렇게 본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일들은 다면체의 한 면처럼 다가온다.
때로는 4면체처럼 세모난 모습으로 보이고 때로는 6면체처럼 네모난 모습으로 보인다.
조금 삐딱하게 보면 세모인지 네모인지 모를 삐뚤어진 모습으로도 보이기도 한다.
세모나 네모로 분간할 수 있는 순간도 있지만 도무지 이게 뭔지 모르는 순간도 있다.
8면체인지 12면체인지 20면체인지 도통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길 위에 서 있기는 한데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분명히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 내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내 눈은 지구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구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둥그런지 알 수가 없다.
지구가 내 두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 눈에 비친 모습이 그것의 전부라고 우길 수 없다.
내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산길인데 올라가는 사람은 힘들고 내려가는 사람은 수월하다.
같은 길인데 올라가는 사람은 산꼭대기를 보고 내려가는 사람은 산 아래를 바라본다.
사람마다 보는 각도가 다르다.
내가 보는 것을 당신도 봐야 한다고 고집 피우지 말아야 한다.
옷차림이 신분을 드러냈던 시절에도 남루한 옷차림의 왕자를 만날 수 있었고 화려한 옷차림의 거지도 만날 수 있었다.
옷차림이 그 사람의 신분을 다 드러내지 못했다.
앞에서 볼 때와 뒤에서 볼 때가 다르고 왼쪽에서 볼 때와 오른쪽에서 볼 때가 다르다.
땅에서 올려다보면 까마득하게 높은 건물인데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성냥갑처럼 납작하게만 보인다.
학생들한테는 무서운 선생님인데 자기 아들딸에게는 사랑 많은 인자한 부모일 수 있다.
모네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건물을 보면서도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렸다.
시간에 따라 빛이 비치는 상황에 따라 달리 보였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을 바라보면서 마오쩌뚱은 “장성(長城)에 올라 보지 못한 자는 장부(丈夫)가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남자들이 앞다투어 만리장성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한 시인은 “장성은 보면서도 장성 밑에 쌓인 뼈들은 볼 수 없더냐?” 되물었다고 한다.
시인은 장성을 쌓다가 목숨을 잃은 수많은 백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에 갔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남한산성>을 쓸 때 매일 산성길을 걸으면서 그 돌들을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한다.
나도 따라서 산성의 돌들을 만져봤다.
그 순간 남한산성의 경치 외에 다른 것이 보였다.
돌들을 짊어지고 온 사람들, 돌들을 쌓은 사람들, 그 돌 아래서 산성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 산성에서 끌려갔던 사람들, 그들의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시선을 조금만 돌렸더니 그들이 보였다.
시인 안도현 선생이 간장게장을 먹다가 무언가 보았다.
밥도둑으로만 보였던 간장게장 속에서 불현듯 어머니를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를 썼다.
<너에게 묻는다>를 읽고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못했던 것처럼 <스며드는 것>을 접한 사람은 간장게장 함부로 먹지 못할 것 같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다가
버둥거렸다가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