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나이를 잊어버릴 때가 있다.
오십을 넘기면서 굳이 나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다 보니 자꾸 나이를 까먹는다.
나이를 까먹는다고 해서 나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닌데 내 입에서는 자꾸 작년의 나이나 재작년의 나이가 튀어나온다.
적어도 고등학생 때까지는 나이를 빨리 먹고 싶었다.
설날에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 먹는다고 하길래 일부러 떡국 두 그릇을 먹은 적도 있었다.
낯선 아이와 실랑이가 벌어질 때면 “너 몇 살이야?”라며 나이를 따져 물었었다.
18세 미만 출입금지 표지를 보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때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다.
이십 대와 삼십 대에는 제 나이대로 시간이 가는 것 같았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았다.
사십 대를 지면서는 나이를 붙들어 두고 싶었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이 시간이 더디게 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곧 오십 대가 되었다.
슬슬 나이를 잊고 싶은 시기가 된 거다.
공자 선생은 당신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했는데 나는 공자 선생의 수준에 한창 밑돌기 때문에 하늘의 뜻을 아직도 모르겠다.
단지 오십 대를 살면서 나에게 나타난 변화 한 가지는 분명히 있다.
내 감정이 출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잔잔한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이 그어진 것처럼 내 감정에도 수평선이 그어진 것 같다.
여간해서는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다.
삶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같다.
내가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오십 대를 살아가다 보니 쉬운 일을 만나도, 어려운 일을 접해도,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하는데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남들도 나만큼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한껏 기뻐해야 하는데 이 일도 곧 지나갈 거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감정이 메말라 버렸다.
전에는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그것을 얻고 싶어서 몇 번이나 들춰보았던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에 요동치는 설렘이 있었다.
지금은 새로운 물건이 나와도 그저 그런 눈으로 쳐다본다.
도리어 굳이 그것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을까 의아해한다.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멀리서 친구가 찾아온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냐고 노래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부담스럽다.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밥이나 먹을까?” 형식적인 말 몇 마디 주고받으면 더 이상 이어갈 이야깃거리가 없다.
그와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눌 것도 아니고 프로야구 이야기를 나눌 것도 아니다.
오래전에 그와 함께 보냈던 날들을 소환해서 그때의 이야기 퍼즐들을 맞춰갈 뿐이다.
몸은 오십 대인데 그와 나누는 이야기는 스무 살 때의 이야기이다.
절반은 잊어버렸고 절반은 가물가물하다.
그러니 예쁘게 채색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아이돌 가수에 열광하는 아이들이 부럽고 트로트 가수에 몰입하는 어른들이 부럽다.
그들은 적어도 자기 가슴을 뛰게 하는 무엇인가 하나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게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내가 이재무의 시 <간절>을 자주 읊조리는 이유는 나에게서 빠져나간 그 간절함이 그립기 때문이다.
잔잔한 수평선이 아니라 파도처럼 출렁이던 감정선이 그립기 때문이다.
두 손 모으고 빌었던 그 간절함을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 이재무 <간절>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