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대가인 톨스토이가 천문학 강좌에 참석해서 은하계의 스펙트럼 분석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그야말로 명강의였다.
그런데 그 강연장에 있는 청중들을 보니 천문학자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 자리에는 남편과 함께 온 부인들이 많았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갖춘 여성들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왜 낮과 밤, 겨울과 여름이 생기는지 잘 모르는 부인들도 많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톨스토이는 천문학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선생님만 한 지식과 명강연의 솜씨를 갖춘 분께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만이라도 좋으니 기초적인 우주학의 강연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그 머리 좋은 천문학자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그야 좋겠지요. 매우 좋은 말씀이지만 사실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은하의 스펙트럼 분석 강연을 하는 것이 저에게는 훨씬 쉽습니다.”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작품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짧은 일화에서 톨스토이는 매우 중요한 말을 들려주고 있다.
클레오파트라 시대를 다룬 시를 쓰는 것이 단순한 이야기로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이다.
찬란한 채색으로 로마를 불태우는 네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연필 하나를 가지고 보는 이의 마음을 찡하게 하거나 웃기게 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
브람스 풍의 교향곡이나 바그너 풍의 오페라를 쓰는 것이 간단명료한 멜로디로 듣는 사람의 마음에 남는 음악을 작곡하는 일보다 쉽다는 것이다.
설마 그러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겠지만 맞는 말이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에게 명작을 보여주고 들려주더라도 아이는 그것을 명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이에게는 뽀로로 같은 작품을 더 좋아할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유치하게 보여도 아이들에게는 명작일 수 있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독립예술가협회 전시회에서 마르셀 뒤샹은 남성 소변기를 뒤집어서 작품으로 내걸었다.
작품의 이름은 ‘샘’이었다.
공연기획자들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소변기를 전시장 칸막이 밖에 방치하였다.
이것도 예술이냐고 비아냥 받았던 뒤집힌 소변기는 그렇게 묻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세기 최고의 예술품 중의 하나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들은 잠시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뒤샹은 그런 물건들에게도 작가의 생각을 담는다면 하나의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뒤집어 놓은 소변기를 ‘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도 미술이냐고 하겠지만 작가가 ‘이것도 미술이다!’라고 외치면 그것도 미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념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출발하게 된 것이다.
나이가 더해가면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보면 한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인생은 이런 것이라는 인생학 강의 같은 말이다.
하지만 그가 사는 인생과 내가 살아온 인생이 같을 리는 없다.
나에게는 이 길이 좋은 길 같은데 그에게는 저 길이 좋을 수 있다.
어느 길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까 자연스레 무게감 있는 말들에 관심이 간다.
하지만 가벼운 말이라고 해서 무시할 말은 아니다.
어쩌면 삶의 진리는 가벼운 말 속에 묻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전쟁과 평화> 같은 대작에 감동을 받지만 어떤 이들은 <왕자와 거지> 같은 동화에 감동을 받는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고 해서 인생의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 동네에서 평생을 살다 가신 우리 할머니가 더 많은 인생의 진리를 알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