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말도 있고 표정도 있고 신체적인 접촉도 있다.
이것들은 직접 대면해서 이루어지는 방법이니까 1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사용한다.
사람은 많이 진화한 존재이니까 이런 1차적인 방법을 넘어서 2차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글, 그림, 사진, 음악, 춤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도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자신의 몸을 사용해서 직접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매개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하기에 이 방법을 2차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이 외에도 또 이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심전심으로 통한다고 하는 것이 있다.
텔레파시 같은 것이다.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매개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서로 마음이 통했다며 교감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사람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때 자신이 전하려고 하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만 들려주려고 한다.
그 이외의 것은 감춘다.
가령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숲길을 알려준다고 치자.
그러면 그곳의 분위기가 너무 좋다느니 환상적이라느니 하는 말을 쏟아낼 것이다.
글도 그렇게 쓰고 그림도 그렇게 그릴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열매의 고약한 냄새 같은 것은 생략한다.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문드러진 지저분한 은행잎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 장소의 불편한 편의시설과 수많은 인파로 인해 시끄럽고 피곤하다는 사실은 들려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곳에서 자신이 좋게 여겼던 것만 말하고 보여준다.
그곳을 그린 그림도 예뻐 보이고 찍은 사진도 아름다워 보인다.
지상낙원이 바로 여기라고 외치는 것 같다.
하지만 속지 말아야 한다.
보여주는 것만 보는 사람은 보여주는 사람의 손바닥에 잡힌 것이다.
들려주는 것만 듣는 사람은 들려주는 의도에 걸려든 것이다.
보여주는 것 이외의 장면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들려주는 것 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삐딱하게 해서 바라보아야 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예민하게 들어야 한다.
그러면 1차원적으로 여겼던 것들이 3차원적으로 보일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북한군이 전투를 치렀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그럴싸해 보였다.
눈을 삐딱하게 하고 다시 보았다.
기자가 어디에서 그 기사를 쓴 것인지 찾아보았다.
아무 데도 안 나와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서울의 어느 카페나 사무실에서 쓴 기사일 것이다.
전에는 신문 기사라면 덮어 놓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
보여주는 것만 보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것도 보려고 하니까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게 보인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신문과 방송들은 해리스가 당선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어느 여론조사에서 나온 수치를 보여주었고 어느 외국 신문이 보도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자신들이 직접 사람들을 만나본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확신에 찬 논조로 기사를 썼다.
결과는 트럼프의 압승이었다.
기자들은 자기가 쓴 글을 보고서 해리스에 투자한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폭삭 망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미안한 마음은 들까?
이런 일들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까 보여주는 것만 보지 않고 들려주는 것만 듣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보여주지 않는 것, 그들이 들려주지 않는 것에 오히려 더 많은 진실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보이고 들릴 것이다.
그때 좀 삐딱하게 눈을 내리깔고 보아야겠다.
좀 예민하게 귀를 세우고 들어야겠다.
어쩌면 보여주지 않는 것과 들려주지 않는 것이 진실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