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의 단상

by 박은석


삼일절과 광복절이 낀 주간에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책을 읽는다.

더 알기 위한 마음도 있지만 잊지 않기 위한 마음도 있다.

나는 나라 잃은 슬픔을 겪은 적이 없다.

그러기에 독립운동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인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 일인지 도통 감이 안 잡힌다.

책 속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독립운동이 어떤 것인지 어슴푸레 느낄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책 속의 그 당시 그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 총성을 울린 안중근 열사의 모습을 지켜본다.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그 용맹함에 박수를 보낸다.

1943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모습을 바라본다.

동양의 승리자라며 잘난체하던 일제의 군 장성들을 처단한 그 용맹함에 박수를 보낸다.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고 해서 우리가 일본에 승리한 것은 아니다.

그로부터 열 달 후인 1910년 8월 29일에 우리의 국권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이완용 같은 매국노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버렸다.

한일합방이라느니 한일병합이라느니 하는 허울 좋은 말로 치장을 했지만 합방도 병합도 아니다.

일제가 강도질하듯이 빼앗았다.

병탄(倂呑)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혁명선언>의 첫 문장에서 그 사정을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의거를 행했다고 해서 일본이 우리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일제는 더욱 우리 민족에게 압력을 가하여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행했고 아침마다 동쪽을 향해 절을 하게 하는가 하면 단체로 남산 일본 신궁에 올라가 절을 하게 했다.




1920년 6월에 중국 지린성 봉오동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이끌었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157명을 죽이고 3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같은 해 10월 간도의 청산리에서는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연합하여 일본군 연대장 포함 1,200여 명을 사살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으로 인해서 일본 군대가 초토화된 것은 아니다.

일본군은 패배에 대한 설욕으로 간도에 살고 있던 조선인 수천 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간도참변은 일제의 잔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람이라면 차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게 일본 군인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입에서는 ‘일본 사람’이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고 일본 다음에는 ‘놈’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세월이 많이 지났고 체면도 있으니 좋은 말을 써야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내 입에서는 일본놈이 자연스럽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약자는 강자를 섬겨야 한다는 말도 들었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시켜준다는 말도 들었을 것이다.

조선은 스스로 독립할 의지도 없고 힘도 없는 나라라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2차세계대전 때 연합국이 승리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전부 다 개소리다!

그런 말을 했던 자들은 우리가 광복을 맞이할 때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고 했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변절하고 친일했다.

하지만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사실을 믿은 사람들은 끝까지 저항했다.

해방될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불살랐다.

지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들은 울지 않았다.

웃으며 떠나갔다.

자랑스럽게.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대한국민으로 살고 있다.

어찌 고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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