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도 사진 한 장으로 남을 것이다

by 박은석


2026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2025년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분명 2025년에 나에게는 대단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을 들은 때도 있었고 마음 졸이며 결과를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려서 기쁨의 환성을 터뜨린 때도 있었고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서 쩔쩔맸던 때도 있었다.

하는 일이 잘 되어 자신감이 넘쳐났던 때도 있었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답답해할 때도 있었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하며 걸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죽을 동 살 동했다.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캄캄한 밤만 이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캄캄한 밤도 시간이 지나니 새벽이 오고 아침이 왔다.

영원한 줄 알았던 그 슬펐던 날도 기뻤던 날도 1년 365일 중의 한 날이 되고 말았다.

평범한 한 날이 되었다.




지리산 종주를 할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가야 할 길은 많이 남았는데 앞에 턱 하니 높은 고개가 나타날 때가 있었다.

그 고개를 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만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이 일을 시작했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지다시피 하였을 때 천왕봉에 올라 있었다.

천왕봉에서 뒤를 돌아 걸어온 길을 내려다봤다.

지나온 고개들이 다 고만고만했다.

어느 고개에서 내가 지쳐했었는지, 어느 고개에서 주저앉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힘든 고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정복한 고개만 보일 뿐이었다.

지나고 보면 그렇다.

앞에 놓여 있을 때는 태산 같지만 지나고 보면 그냥 넘어온 고개일 뿐이다.

지나고 나면 추억이라는 이름의 사진 한 장만 남는다.

지리산 종주라는 폴더 안에 사진 한 장 저장될 뿐이다.




자동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면 창밖으로 아파트촌이 지나가고 한강물도 지나고 크고 작은 산들도 지나간다.

논밭의 풍경도 지나가고 길가를 걸어가는 사람들도 지나간다.

모두 다 지나간다.

분명히 그 아파트 단지에서 별의별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한강물은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크고 작은 산속의 온갖 풀들이 하늘거리고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흥겨운 휘파람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나에게는 그 장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그냥 한 장의 사진처럼 찍힐 뿐이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질 뿐이다.

누군가에게 내가 지나간 길을 이야기한다면 아파트촌을 지나고 한강물을 바라보면서 산길과 논밭길을 거쳐 왔다고 할 것이다.

정지된 화면의 사진 한 장처럼 수채화 한 폭처럼 말이다.




어느새 부쩍 커버린 아이들을 본다.

저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는 요만했는데 이제는 제 엄마보다 키가 더 크다는 게 신기하다.

저게 제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이가 맞나 싶다.

영차하면서 뒤집기를 할 때가 이었다.

두 팔을 바닥에 붙여 재빠르게 기어다닐 때가 있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가 있었다.

“이게 뭐야?”를 연달아 내뱉으며 모든 사물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때가 있었다.

유치원에 다녀오겠다며 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나서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다.

밤늦도록 머리를 싸매며 공부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숱한 날 웃기도 많이 웃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날들이 모두 사진 한 장처럼 남았다.

지금 이 순간도 조금 지나면 사진 한 장으로 남을 것이다.

언젠가 오래된 앨범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아마 이 한마디 하겠지.

“그런 때가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