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소개, 살아줘서 고맙습니다-나태주

by 박은석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 나태주


죽을병 걸려 반년

병원에서 엎드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나온 날

사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인사를 했다


왜 내가,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인사해야지 저쪽에서 거꾸로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인사하는 걸까?

그때는 그것이 궁금했었다


지나면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구나 싶었다

같이 밥 먹어줘서 고맙습니다

사랑해줘서 고맙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 얼마나 눈물겨운 세상인가

이런 세상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 4시 57분에 문자가 왔었다. 다급함이 묻어 있는 문자였다. 하긴 새벽 시간에 오는 문자는 다급하다. 그 시간에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에게는 체면 차릴 여유가 없다. 무슨 큰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 새벽에 문자메시지를 보낼 리가 없다. 새벽 4시 57분에 보낸 이유는 아마 내가 그 시간에 그 문자메시지를 들여다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도 그 새벽 시간에 문자메시지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더군다나 토요일 새벽이다. 나도 간간이 새벽기도회를 빼먹는 날이 토요일이다. 문자메시지를 보낸 분은 내가 어떤 상황인지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었던 게 분명하다. 하긴 토요일 새벽 4시 57분에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시간에 일어날 것이고 문자메시지를 볼 것이라는 생각만 했을 것이다.




그분의 바람이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새벽 5시에 잠에서 깼다. 평상시 습관처럼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문자메시지가 온 줄은 몰랐다. 알림 표시를 들여다보지 않았으니까.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급한 심정이었을 테지만 나에게는 문자메시지가 왔는지 안 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설마 그 새벽에 누군가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교회로 갔다. 새벽기도회 시간이 끝났다. 불 꺼진 예배당에는 조용한 기도소리들이 퍼졌다. 그 새벽에 예배당에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간절한 소원들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시간에 예배당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다. 잠시 기도를 드리다가 눈을 떴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휴대폰을 꺼냈다. 굳이 그 시간에 휴대폰을 볼 필요도 없는데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내 손이 휴대폰을 열었다.




내 눈이 휴대폰 화면에서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을 찾았다. 문자메시지였다. 숫자 1이 떠 있었다.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내가 아직 읽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서 열어보았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서 쓴 메시지가 분명했다. “딸이... 밤 12시에... 너무 아프다고 해서... 응급실로 갔어요. 검사 결과 맹장 밑에 충수돌기 염증이 있대요. 잘라내야 한대요. 다른 염증도 있을 수 있대요. 그러면 그것도 잘라내야 한대요. 수술은 아침 7시에 한대요. 전신마취한대요. 기도삽관도 한대요. 걱정이 돼요. 너무 떨리고 긴장돼요. 기도해 주세요. 제발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말이 아니라 부르짖음이랄까. 시집간 딸이 갑자기 너무 아프다고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나 보다. 평소 씩씩한 딸이었는데 꺼져가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나 보다.




나는 누나가 세 명 있다. 누나들이 한 명씩 시집갔을 때 어머니는 무슨 큰 숙제를 푼 것 같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누나들이 어디 아프다거나 뭔가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머니는 큰 한숨을 쉬었다. 그전에 쉬었던 한숨과는 결이 다른 한숨이었다. 어머니는 누나들이 아픈 것이 어머니 때문이고, 누나들이 힘들어하는 게 어머니 때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지켜본 내가 보기엔 그랬다. 세상의 모든 딸들은 자기 어머니와 샴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나 보다. 그래서 딸이 아프면 어머니가 아프고 딸이 힘들어하면 어머니가 힘들어하나 보다. 한밤중에 딸이 아프다고 하니까 친정어머니가 한달음에 달려갔을 것이다. 구급차를 불러 급히 병원으로 갔을 것이다. 진료를 받은 후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어쩔 줄 몰라하며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문자메시지를 봤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어서 아픈 사람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 물론 그분이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은 들으실 것이다.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특별한 기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특별하게 내가 드리는 기도에 관심을 갖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없던 힘도 다시 생긴다. 희망이 생기고 소망이 깃든다. 그분이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이유가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자신도 기도하고 있지만 누군가 함께 기도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느끼며 나도 한 글자 한 글자 눌러가며 기도문을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내 기도가 특별한 기도는 아니었다. 지금 보더라도 단순한 기도문이었다. 초등학생도 쓸 수 있는 기도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간절함이 듬뿍 들어간 기도문이었다. 세상 살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말은 모두 단순하다. 길 조심해라. 사람 조심해라. 부지런해라. 성실해라. 정직해라. 아프지 마라. 잘 견뎌라. 모두 단순한 말들이다. 단순해서 값어치가 없나? 그렇지 않다. 이보다 중요한 말을 찾기가 어렵다. 가장 단순한 말이 가장 귀한 말이 된다. 기도문도 그렇다. 새벽부터 문자메시지를 계속 주고받으려는 마음은 없었는데 그분에게서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다. 누군가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이제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2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그때까지 기도할 거라고 했다. 수술실에 딸을 들여보내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2시간 후에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다. 수술 잘 끝났다고. 지금 회복실에서 회복 중이라고. 고맙다고. “다행이다” 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는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어머니로서 간밤부터 그때까지의 열 시간이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시인 랭보의 ‘지옥에서의 한철’이 바로 이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수술 후 회복된 딸에게 친정어머니는 어떤 말을 건넬까? 수고했다는 말? 고생했다는 말? 물론 그런 말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말, 꼭 하고 싶은 말, 꼭 해 줄 말이 있을 것이다. “살아줘서 고맙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다. 내 배에서 나온 딸, 아들이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가 고마워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어머니들은 고마워한다. “살아줘서 고맙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주며 살았으면 좋겠다. 살자, 살아주자, 잘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