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by 박은석


대학생 때 내 주변에는 외국어를 배우는 선배와 친구와 후배들이 많았다. 외국어를 배우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2개 정도의 큼지막한 사전을 들고 다녔다. 하나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사전이고 하나는 우리말을 외국어로 번역한 사전이었다. 사전에 손때가 얼마나 짙게 묻어났느냐에 따라서 공부한 시간을 헤아릴 수 있었다. 어휘와 문법은 그렇게 사전과 책을 보면서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발음과 회화는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터넷강의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가정용 컴퓨터도 귀한 시절이었다. 영어를 공부하는 이들은 AFKN 방송이라도 있으니까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러시아어, 중국어, 태국어, 베트남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등을 배우는 이들은 공부가 쉽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단파라디오이다. 나도 외국어 배워본답시고 용산전자상가에서 단파라디오를 하나 샀다.




자그마한 물건이었는데 채널을 돌리다 보면 BBC방송도 들렸고 태국어도 들렸고 러시아어와 중국어도 들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간첩을 보면 신고하라는 포스터가 버스에 붙어 있곤 했다. 시꺼먼 사람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듣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포스터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 간첩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단파라디오를 본 순간 간첩들이 이런 라디오를 사용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단파라디오는 신기했다. 그전까지는 라디오에서 한국어 방송만 나오는 줄 알았다. 다른 나라 방송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단파라디오에서는 다른 나라 방송들도 들을 수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그건 라디오가 어떤 주파수를 잡느냐의 차이였다. 그때 실감했다. 내 옆으로 엄청나게 많은 주파수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가진 라디오가 그 수많은 주파수 중에서 잡아내는 방송만 내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소리를 낸다. 움직이는 순간 공기의 저항이 생기고 그게 소리로 들린다. 입을 움직이면 말소리가 들리고 빨리 달리면 바람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 소리들 중에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도 있다. 내 발 밑을 기어가는 개미들도 분명히 소리를 낼 텐데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너무 작은 소리여서 그렇다. 지구는 1초에 436미터를 움직인다고 한다. 지구의 자전 속도이다. 서울 지하철의 속도는 시속 36킬로미터쯤 된다. 1초에 10미터의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이 지나갈 때면 꽤 시끄럽다. 지하철로부터 100미터를 떨어져 있어도 그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지구는 지하철보다 43.6배나 더 빨리 움직이는데도 나는 지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너무 큰 소리여서 그렇다. 내 귀는 개미들이 재잘거리는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하고 지구가 자전하면서 내는 너무 큰 소리도 듣지 못한다.




모든 소리에는 주파수가 있는데 그 주파수에 따라서 내 귀에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기도 한다. 너무 작은 소리나 너무 큰 소리가 내 귀에 안 들리는 이유는 그 주파수들을 내 귀가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리에만 주파수가 있는 게 아니다. 사람 자체에도 주파수가 있다. 이상하게도 얼굴만 봐도 편한 사람이 있고 얼굴만 봐도 불편한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편한 사람과는 주파수가 맞아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불편한 사람과는 주파수가 안 맞아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몇 년째 전쟁을 벌이는 이유도 주파수가 안 맞기 때문이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과 싸우는 이유도 주파수가 안 맞기 때문이다. 주파수가 안 맞으니까 시끄럽기만 하다. 단파라디오는 채널을 살짝 돌리면 주파수가 맞아서 시원해지던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은 뭐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