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어느 날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한 노인이 객차 안을 지나가다가 파란 눈의 서양 선교사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이보시오.
선교사 양반.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겠소?” 그러지 않아도 그 노인을 고깝게 지켜보고 있던 선교사는 굉장히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답하였다.
“당신이 교회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2천만 조선 동포에게 사죄하기 전에는 천국에는 갈 수 없을 것이오!”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선교사의 대답에 노인은 깜짝 놀랐다.
파란 눈의 선교사는 노인을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같은 공간에 앉아 있기 싫다는 듯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 노인의 이름은 이완용, 을사오적 중에서도 최악의 매국노였다.
그리고 기세 등등한 그에게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은 인물은 ‘서른네 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리는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석호필)였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가난한 영국계 캐나다인이었지만 부지런히 공부하여 토론토대학교의 수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그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안락한 생활을 접고 1916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슨 총장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면서 나름대로 선교사역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온 지 3년이 되던 1919년에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일이 일어났다.
직장 동료였던 이갑성이 그를 찾아와서 자신의 품에서 문서를 하나 꺼내었다.
그 문서는 바로 <대한독립선언서>였다.
이갑성은 스코필드 선교사에게 조선에서 비밀리에 추진 중인 독립만세운동을 해외에 알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그 자리에서 스코필드 선교사는 주저함도 없이 이갑성의 손을 잡아주었고 자신의 집과 교회를 비밀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그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스코필드는 만세운동의 현장에 가서 일본 경찰들 몰래 보도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가 촬영한 사진필름은 일제의 삼엄한 검열을 피해 어느 독립운동가의 구두 밑창에 숨겨져서 상해임시정부로 전달되었고 이후에 전 세계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3.1운동의 사진자료들은 모두 스코필드가 찍은 작품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코필드는 일제가 수원의 어느 마을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서 일제의 만행을 낱낱이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교회에서 29명의 마을 사람들이 총에 맞고 불에 타서 죽은 사건은 스코필드에 의해서 그렇게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1919년 5월에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앳된 여학생 유관순 열사를 방문하여 위로하였고 일제에게는 당장 고문을 중단하라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스코필드를 조선에서 가장 위험한 외국인으로 지목하여 1920년에 강제 출국시켜버렸다.
하지만 스코필드는 조선의 교회로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며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수입의 절반을 저축하고 있으니 독립의 꿈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해방 후 꽤 시간이 지난 1958년에 스코필드는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1970년 4월 12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3.1운동의 정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았다.
자신이 죽으면 조선 땅에 묻어달라고 했던 그의 소원대로 그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 한국명 석호필(石虎必).
그는 돌(石)처럼 강하고 호랑이(虎)처럼 굳센 마음으로 한국인에게 필(必)요한 사람이 되겠다며 자신의 이름까지 바꿨다.
일평생 3.1운동의 정신을 전하였던 그를 우리는 ‘서른네 번째 민족대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