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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벅찬 오늘 하루
사람은 짝퉁이 없다
by
박은석
Apr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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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잠시 살았던 때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처음 만날 때면 무척 조심스러웠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외모만으로는 분간이 안 되었다.
명함을 보고서야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를 알 수 있었다.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들의 삶은 치열한 전쟁터 같다.
개인적인 사정을 들어보아도 하나같이 사연이 많고 깊다.
머나먼 타국에 공장을 짓고 사무실을 차리느라 고향의 재산을 다 정리한 경우도 많았다.
거기서 실패하면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래서 꼭 성공하리라는 독한 마음으로 무장해 있었다.
성공하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
자신의 사업을 잘 설명하고 협상하여 계약을 맺어야 한다.
협상의 마지막 단계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인감도장을 꾹 눌러 찍지 않고 멋있는 필체로 휘리릭 사인을 한다.
사인을 할 일이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은 재킷 안주머니나 와이셔츠 왼쪽 가슴 주머니에 늘 볼펜이나 만년필을 꽂고 다녔다.
기왕이면 필기구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하얀 별이 새겨진 물건으로 장만했다.
그 정도 만년필을 갖고 다닐 정도이니까 꽤 수준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 하얀색 별이 인기가 있어서 그런지 시장 구석에서는 그것과 아주 흡사한 물건들도 팔았다.
흔히 말하는 ‘짝퉁’이다.
흘깃 봤을 때는 잘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명품과 짝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도 어느 모임에서 선물로 하얀 별이 새겨진 볼펜을 받았다.
그런데 차마 그놈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오히려 누가 볼까 봐서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었다.
괜히 남들에게 보였다가는 나의 존재까지도 짝퉁이 될 것 같았다.
‘기왕에 만들 거면 좀 제대로 만들지!’하는 씁쓸한 마음만 가득하였다.
그러던 중에 어느 대기업 CEO이셨던 분을 만났다.
그분의 왼쪽 손목에는 족보에 등장하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이거 남대문 제야.”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설마 그러겠냐면서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자 그분이 시계를 벗어 보이면서 당신은 분명 짝퉁 시계를 차고 다니는데 아무도 짝퉁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셨다.
심지어는 시계방 사장조차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그 시계를 한번 보자며 어디서 얼마를 주고 구입했냐고 즐거운 난리를 피웠다.
‘만약 저 시계를 내가 차고 다녀도 사람들이 명품 시계라고 볼까?’라는 우스운 상상을 해보았다.
명품을 차고 다녀도 짝퉁이라고 여기는데 짝퉁을 차고 다녀도 명품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그 물건을 차고 다니는 사람이 누구냐에 달려 있다.
어찌 보면 짝퉁이란 것은 없다.
명품을 베꼈다고 해도 나름대로의 새로운 이름을 붙이면 짝퉁이 아니지 않은가?
중학생 때 한창 나이키, 프로스펙스 같은 운동화가 인기를 끌었다.
장난기 많은 친구들은 싸구려 신발을 구입해서 볼펜으로 그럴싸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제품이 ‘Nice’, ‘Pro Sports’라는 운동화들이다.
조사는 안 해 봤지만 아마 전국 중고등학교에서 꽤 유행했을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였고 가성비 좋은 제품이었다.
유명 메이커에 등재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 나름대로 교실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사람은 짝퉁이 없다.
성형수술을 하고 음성변조를 하고 가면을 여러 개 쓰고 다닌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그 사람’이다.
괜히 다른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안달할 필요가 없다.
가장 자기다운 삶을 살면 된다.
당신 자체가 이미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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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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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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