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가슴 벅찬 오늘 하루
마음은 어린아이인데 몸이..
by
박은석
May 5. 2021
아래로
저 멀리 횡단보도에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깜빡거린다.
뛰자.
충분할 것 같다.
그런데 몇 걸음 뛰고 나니 무릎이 아프다.
‘아직은 아닐 거야. 갑자기 뛰어서 그래. 스트레칭 좀 하면 다시 100미터를 12초대로 뛸 수 있어.
그게 내 실력이야!’
마음을 추슬러본다.
내가 누군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높이뛰기 선수였다.
중학생 때는 육상부 선수들과 어울려 이어달리기를 했다.
축구 골키퍼를 하면서 맨바닥에 몸을 날렸다.
팔다리에는 찰과상이 남았지만 골은 막았던 사람이다.
고등학생 때는 도 대표와 맞짱 뜨면서 탁구를 쳤다.
물론 21점 게임에서 11점 정도 얻은 게 고작이지만 포레스트 검프처럼 혼자 벽 보면서 탁구를 배웠던 나로서는 괜찮은 점수였다.
대학생 때는 학과별 핸드볼 대회에서 펄펄 날았었다.
핸드볼부에서 같이 운동하자는 제안을 받고 매몰차게 거절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배구선수로 깜짝 변신도 했다.
뭐 하나 제대로 배운 것은 없지만 내 몸이 가볍다는 것으로 ‘하면 된다’를 진리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절대 그때처럼 뛸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밤늦은 시간에 영화나 한 편 볼까 생각했다가 금세 접었다.
한두 시간 즐겁게 보내자고 하루를 망칠 수는 없다.
몸을 아껴야 한다.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적당히 먹어야 한다.
돈 아깝다며 실컷 먹었다가 저녁 내내 속 거북하게 지낼 수는 없다.
몸을 생각해야 한다.
몸 걱정을 하는 내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거라고 들어왔고 말을 해왔지만 어디 그런가?
몸 자랑한다고 라면 다섯 개를 끓여 먹고 끄억 끄억 트림을 해댔던 때가 있었다.
밤새도록 잠 안 자고 딴짓하면서 시간을 축냈던 시절도 있었다.
언젠간 가겠지 했는데 벌써 가버린 푸르른 청춘이었다.
몇 년 전에 꽃 축제장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한 부류의 아주머니들이 긴 줄을 돌리면서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렸을 때 잘했던 놀이라면서 깔깔거리고들 계셨다.
그중의 한 분이 직접 뛰겠다며 줄로 달려드셨다.
걸렸다!
다시 한 번 시도하셨다.
또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은 펄쩍 뛰는 흉내를 내셨는데 발이 땅에 붙어 있었다.
줄 돌리는 친구에게 일부러 자기를 걸리게 하는 거 아니냐고, 줄 좀 잘 돌리라고 큰소리를 치셨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줄 돌리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 사람은 안다.
자기는 분명히 뛰었다고 하는데 뛰지 못했다.
발은 여전히 땅에 붙은 채 입으로만 펄쩍 뛰었다.
그분도 속으로는 열 살 소녀시절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키보다 높은 고무줄도 땅에 손을 짚고 공중으로 발차기를 하면서 잡았던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변해간다 변해간다 해도 나는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것들은 안 변하고 나만 변한 것 같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노랫소리가 들리면 속으로 함께 따라 부른다.
마치 내가 그때로 돌아간 듯 말이다.
그때는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로버트 프루스트는 <자작나무>라는 시에서 나뭇가지를 잡고 뛰놀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몸은 돌아갈 수 없어도 마음은 수도 없이 갔다 올 수 있다.
내 마음속에는 그때의 꼬마가, 중고등학생이, 청년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어린아이인데 몸이...’하면서 후회하지 말자.
마음에 어린아이가 있고 몸이 어른이라면 원하는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다.
그때는 어른이 부러웠고 지금은 아이가 부러운 거니까.
keyword
마음
어린이
감성에세이
44
댓글
10
댓글
10
댓글 더보기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팔로워
595
제안하기
팔로우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 모든 빛이 다 햇빛이다
안 될 거야! 잘 될 거야! 내 마음의 선택은?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