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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y 19. 2021

네 식구가 한 방에서 지내는 날


오랜만에 네 식구가 한 방에서 뒹굴거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오래전에는 그렇게 지냈다.

그렇게 살았다.

이부자리를 깔면 나와 아내 사이에 딸과 아들이 함께 누워 잤다.

아내가 읽어주는 이야기책을 들으면서, 끝말잇기를 하면서, 수수께끼를 풀면서 지냈다.

승부욕이 강해서 자기가 지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그러던 아이들인데 중학생이 되면서 딸이 먼저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린 아들이 차츰 커가면서 셋이서 한 방에 자기도 어려워졌다.

아들은 자라면서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아빠와 경쟁을 한다.

그때 힘이 없는 아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은 이상 없다.

아빠와 아들 중에서 방에서 쫓겨나야 할 사람은 당연히 아빠이다.

그렇게 내가 거실로 나오면서 우리 가족의 한 방 살림은 끝이 났다.

휴가철에 어디 놀러 갔을 때에나 다시 합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네 식구가 한 방에 모이게 되었다.

집에 문제가 생겨서 공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에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이웃 동네에 숙소를 하나 잡았다.

학교 수업을 마친 아들과 아내가 먼저 가 있었다.

그리고 학원 수업을 마친 딸과 내가 합류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반갑고 설렌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평상시와는 색다른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

한 방에 있으면 마음이 누그러워진다.

조급할 게 없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도 않는다.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음식 준비를 할 것도 없다.

근처 마트에서 주먹밥을 사왔다.

편의점에 들러서 사발면도 네 개 샀다.

평상시에는 살살 눈치를 보면서 라면을 먹었는데 한 방에 있으면 그런 눈치를 볼 것도 없다.

그래도 지키지 못할 약속이지만 한 마디는 한다.

“이번이 마지막 라면이야.”




방을 두 개 잡을 수도 있고 네 개 잡을 수도 있는데 이럴 때는 꼭 하나만 잡으려고 한다.

찢어지기 싫은 거다.

집에서는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려고 하는 아이들도 밖에서는 한 방에 모이려고 한다.

TV를 보고 게임을 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더라도 너그러이 받아줄 수 있다.

한 방에 있으니까.

재잘재잘 속에 있던 이야기들도 다 털어놓는다.

비밀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간이 되어버린다.

한 방에 있으면 그렇게 된다.


영국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절에는 여성들만의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성들을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로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자기만의 방을 포기하고 한 방에 모였다.

자발적이었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든지 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이 시간이 재미있게 여겨지는 것은 매일 이렇게 살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아주 가끔 찾아오는 기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 방에 있으면 오래전 아이들이 아기들이었을 때, 엄마 아빠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젊었을 때로 돌아간 듯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이 요동을 치더라도 우리 네 식구만 이렇게 모이면 어디든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창한 세간 살림이 없더라도 괜찮다.

옷가지가 몇 안 되어도 좋다.

자동차 같은 것은 없어도 그만이다.

뭐 해 먹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외식이다.

소꿉놀이 같고 소풍 온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런 날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오늘 한 방에서 마음껏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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