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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벅찬 오늘 하루
열쇠를 가진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by
박은석
Jun 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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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머니에는 사무실 열쇠가 하나 들어 있다.
요즘은 열쇠 대신 카드를 갖다 대거나 손가락 지문을 대거나 아니면 비밀번호를 눌러서 문을 연다.
홍채 인식 방법도 있는데 이것은 좀 폼이 안 난다.
문 앞에서 눈깔을 맞춰본다는 게 웃긴다.
사람이 문짝의 허가를 받아야 들어간다는 게 나로서는 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다양하게 문을 여는 방법이 진화를 했지만 여전히 열쇠를 돌려야 하는 문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내가 자주 사용하는 사무실의 한 방이다.
물론 내 열쇠지갑에는 여러 가지 열쇠가 꽂혀있다.
하지만 열쇠지갑을 처박아둔 지 꽤 되었다.
예전에는 열쇠를 많이 들고 있으면 마치 뭔가 큰 일을 하는 사람처럼 여겨졌던 때도 있었다.
열쇠를 가진 사람만 열 수 있는 금고가 있었고 그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려면 열쇠 세 개는 갖춰야 한다는 말도 유행했었다.
집 열쇠, 자동차 열쇠, 사무실 열쇠 세 개가 사람을 고르는 기준이었다.
사람의 가치가 열쇠로 점수 매겨졌다는 게 씁쓸하다.
어쨌든 열쇠 소리 짤랑거리는 것을 폼으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집안에서도 열쇠를 가진 사람의 위세가 대단했다.
웃어른을 모시고 살던 시절에는 쌀을 보관하는 광 열쇠를 시어머니가 품에 안고 지냈다.
열쇠를 물려받을 때가 되어야 며느리가 비로소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겪어야 했던 며느리의 설움은 소설책 몇 권을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열쇠는 그렇게나 힘이 있다.
미국에서는 취임하는 대통령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열쇠를 준다.
가장 강대한 나라의 가장 강한 권력자가 쥘 수 있는 열쇠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트럼프는 퇴임하면서도 이 열쇠를 반납하지 않고 가져가는 코미디를 벌이기도 했다.
열쇠는 가진 자에게 힘과 권력을 주기도 하지만 그에 맞는 책임을 묻기도 한다.
열쇠를 가진 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광 열쇠를 가진 사람이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자동차 열쇠를 가진 사람이 자동차를 책임지고, 핵무기 열쇠를 가진 사람이 핵무기를 책임져야 한다.
“내가 책일 질게.”라는 말만으로는 안 된다.
책임진다는 것은 살린다는 말이다.
열쇠를 손에 쥔 사람이 살려내야 한다.
자기는 못 먹더라도 식구들은 먹여야 하고, 자기는 통장이 비더라도 직원들에게는 월급을 줘야 하고, 자기는 죽더라도 사람들은 살려야 한다.
열쇠를 가진 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그런데 책임은 지려 하지 않고 열쇠만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열쇠만 있으면 뭐든지 열 수 있다고 생각지만 막상 그 열쇠로 무엇을 열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열쇠의 가치와 책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열쇠는 한낱 쇳조각일 뿐이다.
로마의 바티칸 광장에는 오른손에 커다란 열쇠를 쥔 성 베드로의 동상이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에서 착안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말을 베드로에게 하늘과 땅을 여닫을 수 있는 천국열쇠가 있다고 해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 중심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개신교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때문에 천국열쇠를 받은 것이므로 신앙고백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쥐었다면 베드로와 그의 후예들이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져야 한다.
신앙고백이 천국열쇠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신앙고백을 하고 신앙고백대로 살아가도록 잘 가르쳐야 한다.
책임을 지지 않는 열쇠는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금 주머니에 있는 사무실 열쇠를 만져본다.
다행이다.
나에게 열쇠가 많지 않다는 것은 내가 책일 질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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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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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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