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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逆鱗)은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비늘이다
by
박은석
Jun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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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의 동물인 용은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본래 그 성품이 참 순하다고 한다.
용과 친해지면 용의 등에 올라타기도 하고 용에게 조화를 부리게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나 순한 용도 발끈할 때가 있다.
사람이 용의 특별한 비늘을 건드릴 때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한비자(韓非子)는 용의 턱 밑에 길이가 약 30Cm 정도 되는 거꾸로 박힌 특이한 비늘이 하나 있다고 했다.
거꾸로 박힌 비늘이란 뜻으로 그것을 ‘역린(逆鱗)’이라고 부른다.
역린은 용의 치명적인 급소이기 때문에 만약 그 비늘이 뽑히면 용은 그 자리에서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 용의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그가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갑자기 포학하게 변하여 오히려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
그래서 용은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용과 친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 용의 역린이다.
우리 옛 어른들은 임금님을 표현할 때 용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임금님의 얼굴을 용안(龍顏)이라고 했고 임금님이 앉는 자리를 용상(龍床)이라고 했다.
용이 사람과 친한 존재이듯이 임금님도 백성들과 친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임금은 백성들의 아버지와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에게 역린이 있듯이 임금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임금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임금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긁어드리는 신하일지라도 임금의 약점을 건드리면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특히 숙종 임금처럼 임금의 힘이 막강할 때는 더욱 그랬다.
임금에게 좋은 말만 하고 그 앞에서 살살 기어야 했다.
마치 용을 쓰다듬으면서 착하다고 예쁘다고 칭찬만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장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성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온 천지가 왕의 세상이 되어버린다.
임금이 백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곧 망한다.
자기가 태양이라고 외쳤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오만함이었는지 몰랐다.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았던 프랑스의 왕정은 그 후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두 세대 만에 단두대의 이슬로 끝이 났다.
그래서 현명한 임금들은 백성을 하늘로 생각했고 백성이 곧 나라라고 하였다.
아비 없는 자식은 있어도 자식 없는 아비는 없듯이 임금 없는 백성은 있어도 백성 없는 임금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임금의 출생의 비밀 등 치명적인 약점을 역린이라고 했는데, 임금에게 있어서 진짜 역린은 바로 백성이었다.
백성을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고 살려야 하는 게 임금의 역린이었다.
이 문제 앞에서 임금은 고개를 숙였고 번번이 “과인(寡人, 덕이 적은 사람)의 덕이 부족했던 탓이오.”라며 자신의 책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백성이었다.
손택수 시인은 <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라는 시에서 역린을 ‘은빛 급브레이크’로 표현하였다.
브레이크가 없으면 멈출 수가 없다.
궤도열차가 무섭기는 해도 기분 좋게 올라탈 수 있는 이유는 한 바퀴 돌고 나면 반드시 멈추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무한 질주하는 열차라면 그 자체가 공포이다.
브레이크가 있어야 한다.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 있어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역린은 용에게 "너도 약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비늘이다.
세상에서 제일 힘세다고 까불지 말라는 것이다.
역린은 임금이 평생 풀어가야 할 숙제였다.
옆에서 누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용이 지켜야 하는 것이고 임금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역린이 있었기에 무시무시한 용도 순할 수 있었고 절대 권력자인 임금도 백성에게 자애로울 수 있었다.
역린은 죽이는 비늘이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비늘이었다.
<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 손택수
가지런하게 한쪽 방향을 향해 누운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달려 있다고 한다
역린(逆鱗),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 하나
더러는 미끼를 향해 달려드는 눈먼 비늘들 사이에서
은빛 급브레이크를 걸기도 하였을까
역적의 수모를 감당하며
의롭게 반짝이기도 하였을까
제 몸을 거스르는 몸, 역린.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내가 나를 펄떡이게 할 때가 있다
십년째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낙향해
물고기 비늘을 털며 사는 친구놈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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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석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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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2009년 1년 200권 읽기 운동 시작. 2021년부터 1년 300권 읽기 운동으로 상향 . 하루에 칼럼 한 편 쓰기. 책과 삶에서 얻은 교훈을 글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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