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아주고 돌봄을 받는 아버지와 아들

by 박은석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예 싹도 틔우지 못할 수 있다.

누군가 옆에서 돌봐주어야 한다.

씨앗이 흙속에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새들의 모이가 되지 않도록, 적당한 수분과 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병충해를 이기도록, 바람에 뽑히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한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해서 배불리 먹고살자고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잘 돌봐주는 것이다.


반면에 씨앗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열매를 맺어서 자신의 종족을 더 많이 번성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잘 부려먹는 것이다.

역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준다.

옛날에는 사람도 적었는데 농작물의 수확도 시원치 않았다.

잘 돌보지 못했고 잘 돌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도 엄청 많아졌는데 농작물의 수확량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잘 돌보고 잘 돌봄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과 씨앗의 관계도 이렇게 상부상조하고 있다.

그 결과 서로 윈윈하게 되었다.

사람이 돌보아주지 않은 씨앗들, 사람의 돌봄을 받지 못한 씨앗들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안간힘을 쓰며 살아남았는데 사람의 눈에 뜨이면 뽑히거나 잘린다.

사람에게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씨앗들은 독한 마음을 품는다.

사람에게 돌봄을 받는 것을 아예 포기한다.

홀로 살아남는 방법들을 터득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으면 이제는 복수를 꿈꾼다.

사람을 괴롭히는 독한 식물이 된다.


돌봄을 받지 못하고 내쳐진 씨앗은 자기들도 똑같이 사람을 내친다.

몸에 안 좋다는 식물들이 그렇다.

원래부터 독한 식물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 같다.

식물들도 사람처럼 다 좋은 상태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싫어하다보니까 어느새 사람들과 척을 지고 서로 상처를 주는 독초가 되었을 것이다.




천지가 창조되었을 때 에덴동산에 독초가 있었다는 말을 성경에서 읽은 적이 없다.

아마 없었을 것이다.

만약 있었다면 에덴동산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에덴’이란 뜻이 ‘기쁨’인데 독초가 있으면 기쁨의 동산이 아니라 ‘무서운 동산’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가 있었지만 그것도 좋은 나무였다.

단지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는 나무였을 뿐이다.

눈으로만 보고 “아! 이쁘다!”하면 된다.


그런데 ‘눈으로만 보세요.’라고 안내문을 붙여놓으면 사람 심리가 꼭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

남들은 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 나는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다는 우쭐한 마음을 갖고 싶어서 그럴 것이다.

선악과나무를 잘 돌봐주어서 보기 좋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것을 먹어버렸다.

안 좋게 만들어버렸다.

그랬더니 선악과나무도 사람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악과나무도 잃었고 에덴동산도 잃었다.




잘 돌보는 것은 내가 이용해먹기 위한 일이 아니다.

나도 살리고 너도 살리는 일이다.

처음에는 내가 손해 보는 것 같다.

괜히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이고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 같다.

하지만 조금 지나고 보면 내가 공들인 것 못지않게 얻는 것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는 다 안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정성과 돈이 들어가는지 모른다.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보면 이런 손해 보는 장사는 벌써 때려치워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해 보는 것 같은데 기분이 좋다.

마음도 즐겁다.

더 잘해주고 싶다.

그 녀석이 빙긋 웃는 모습만 보여도 그까짓 돈이나 시간 아깝지 않다.

사실 그까짓 것은 아닌데 말이다.

부모는 아이를 돌보아주면서 기쁨을 주고 아이는 부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기쁨을 준다.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엊그제 구입한 휴대폰을 아들에게 기분 좋게 뺏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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